어쩌다가 진상이 되어

역할 변신

by 김도형


며칠 전에 올린 <진상이 필요한 이유>가 1800회를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그것도 최근 2~3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내용을 살펴보니 브런치도 아니고 sns도 아닌 기타에서의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디엔가 메인 페이지에 노출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하룻만에 글을 뚝딱 쓰고 올린 후에 조금씩 틀을 잡아가는 요즘, 고맙게도 정성스럽게 읽은 후 피드백을 주곤 하는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 진상 글의 조회수가 급증했어. 어딘가에 노출된 것 같은데. 근데 뭐, 읽어볼 만했어?

- 그런대로 흥미로운 점이 있어서 친한 친구에게도 읽어보라고 했어.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진상이 된 적은 없나 생각도 했고.




Daum의 어학사전에는 '진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진상 <眞相> : 일이나 사건의 참된 내용이나 형편.
보통 사건의 진상 같은 표현을 할 때 자주 쓰인다.
2. 진상 <進上>: 가.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바침
나. 허름하고 나쁜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

요즘 흔히 쓰이는 '진상'(비상식적인 언행으로 주변에 해를 끼치는 사람)의 어원은 進上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과거 왕조 시대에는 진상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의 민폐가 심했다. 그러기에 백성 입장에서는 진상 자체가 몹시 괴로운 대상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뜻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물론 그 외의 설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사내에서는 주기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과 청렴 준수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을 받다 보면 선임 직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

- 저 기준으로 치면 예전 일들은 징계감인데...

본인들이 당했거나 행했던 일들이 현재의 법령으로 따지면 저촉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윗 선배들은 현직을 떠났 이제 남은 자신들의 과거 언행이 은근히 신경 쓰이기 마련인 것이다.


그때 다소 이른 나이지만 어느 정도 직장 일을 정리하고자 마음먹고 비교적 업무 강도가 심하지 않은 부서를 지원했었다. 인사팀에서는 연차를 고려하여 원하는 부서로 발령을 내주었다. 그런데 해당 부서팀의 후배 팀장을 비롯한 부서원들의 환영 인사 표정이 애매했다. 하지만 마지막 근무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은 일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평상시와 같이 근무에 임했다.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자 무겁기만 했던 같은 일도 다소 가볍게 느껴졌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후배 팀장과 부팀장이 커피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 선배님, 첨에 저희 부서에 오셨을 때 걱정했었어요.

- (뭔 말이지)?

- 사실 선배님이 협조를 잘 안 할 거란 얘기가 있었거든요.

-?


알고 보니 이전 부서의 L이라는 한 여직원이 후배 팀장과 같은 연배로 서로 친했다. 가끔씩 점심시간에는 또 다른 여직원과 셋이서 산책하는 모습을 보곤 했었다. 그런데 전 부서에서 근무할 때 그 L이라는 직원이 다른 후배 여직원에게 자신의 업무를 부당하게 전가하는 일이 있었다. 후배 여직원은 1년 계약직이었기에 제대로 의사표현을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 막내 여직원은 계약직이라 여러모로 힘든 점이 많았는데 그런 업무 전가 행위는 진상짓과 다름없었다.


다음날 L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업무 전가는 정상적이지 않다.

원상 복구하지 않으면 책임자와 논의하겠다.


그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의도를 좌초시켰다는 이유로 겨울바람처럼 냉랭해졌고 마주쳐도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서 자신과 가까운 이들에게 나에 대한 험담까지 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자신의 행위를 숨긴타인들에게 왜곡된 시선을 제공하며 비난을 지속했던 것이다.


그제야 부서에서 첫날 느꼈던 기묘한 분위기가 이해되었다. 한마디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 L에게는 내가 진상이 맞을 것이다. 엄청난 잘못도 아니고, 계약직 직원들이 으레 겪는 일인데 왜 나서서 훼방질이야?라고 분개했을 듯하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유사한 일을 벌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그녀들 사이에서는 진상으로 등극했다. 그래서 그녀들이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동안 근무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지만 그것 자체를 문제로 거론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조만간 일을 정리할지도 모르기에 자잘한 일에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 1년 만에 그런 사연을 듣게 된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휑해지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 난 늘 평상시와 똑같이 일해왔는데 지금에서야?


알고 보니 함께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 선배가 아닌 줄 알았지만 자주 만나는 그 L이 두고 보라고 했단다. 그래서 말을 아꼈단다.

그렇게 말로만 듣던 찐진상으로 1년을 살았다.

미처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난 영원히 그녀들의 차가웠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팀장과 팀원들은 오해를 풀었다고 했으나 단 한 명, L에게는 끝까지 진상으로 남았음이 틀림없다.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스스로 조심해도 자신의 역할이 본의 아니게 달라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야 예전 부모님들의 고리타분했던 말씀이 이해된다 해도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여전히 젊은 세대에겐 또다시 지루하기만 할 때가 많다.

삶의 지형이 바뀌고 주어진 역할이 바뀌었음을 알게 될 때 그 당혹감은 매우 크다.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때때로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라떼 세대가 되기도 하고 목소리가 커지면서 진상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바뀔 역, 역학을 왜 배우는 지도 알 것 같다.


이 밤, 의도하지 않았어도 누군가에게 진상으로 기억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 그러하기 쉬운 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도 같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조금이라도 이를 인식하고 있으니 그런 상황을 좀 줄여볼 수는 있겠다는 희망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언행에 신중을 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혹 건전한 진상, 창조적인 진상은 없을까?

아니, 그런 건 애초에 통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나 직급이 올라가고 후배들이 늘어나면 일명 꼰대나 진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기 쉽다. 그러니 창의적인 소통에 에너지를 할애하면 적폐로 지목받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 역할을 기가 막히게 잘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다음엔 그 친구 얘기를 해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