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베란다 밖을 바라보니 눈 내리던 어제밤과는 다르게 환한 달이 떠오르고 있네요. 달은 동그랗던 모습에서 오른쪽 부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선생님은 이렇게 알려주셨지요.
달 모양이 오른손을 구부렸을 때와 같으면 상현달, 왼손의 경우에는 하현달.
달이라곤 보름달과 반달밖에 모르던 어린 학생들에겐 각기 다른 조각달의 명칭이 너무나 헷갈렸습니다.
중간중간 거뭇한 달의 음영은 사람의 얼굴을 닮아보입니다. 밝게 웃던 달이 점점 여위어가면 웬지 마음마저 가라앉는 듯합니다. 그 달이 천천히 얼굴을 돌려 다른 행성을 바라보는 오늘은 11월 7일, 음력으로는 11월 24일입니다.
<달과 6펜스, The Moon and Sixpence>는 1919년에 출판된 영국 작가 윌리엄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
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잘 알려진 것처럼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의 일생을 작품화한 것입니다. 화자는 작가 자신이지요. 그리고 작가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예술가의 생애를 간결한 문체로 객관적으로 묘사했습니다.
40대인 주인공 찰스 스트리클랜드는 런던의 증권 중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는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로 떠납니다.
스트리클랜드는 폭주하는 예술혼이라는 열차를 타고 앞으로 달려갑니다. 목적지도 정해지지않은 열차는 일상이라는 틀을 찢고 질주하지요. 일상의 프레임에 의지해 살아가던 주변 사람들은 그의 행보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과연 주인공 스트리클랜드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
가족과 친구에게 함부로 아픔를 안긴 사람일까요? 주변에는 그림을 전업으로 삼거나 글을 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아니 많이 다릅니다. 대부분 다름에 그치지 않고 별난 상태 - 괴팍하거나 기괴함 - 에 이르지요. 일반적인 윤리도덕의 잣대로는 재단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주인공의 돌발적인 증권사 사직 행위는 한 예술가의 살고자하는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뜨거운 화산을 안고 40여년을 틀에 맞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더이상 견딜수 없는 폭발 직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런던이라는 감옥에서 탈출을 감행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상처난 영혼은 머물렀던 파리마저도 등지고 마침내 원시림 속으로 숨어듭니다. 그리고 문명 이전의 질병인 문둥병을 끌어안고 자신의 예술사를 마감합니다.
제목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종의 naming(이름짓기)입니다. 마케팅 전략의 하나로 판매 타깃을 분석하여 흥미를 끌어내고 구매에 이르도록 만드는 기법입니다. 결은 다르지만 작품명 짓기에도 비슷한 원리가 작동합니다. 물론 목적이 경제적인 이윤 확대인지 예술적 감흥의 압축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이 작품의 본문에는 제목으로 명명된 달과 6펜스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은 그만큼 독립된 공간이며 상징적입니다.
제목의 '달'은 예술적 이상, 꿈, 불멸의 세계를 나타내고 '6펜스'는 예술과는 배치되는 하찮은 세속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주인공은 6펜스의 세계에서 달의 세계로 영혼의 깃대를 옮겨갔습니다.
험난한 우주공간을 가로지르는 추진력은 오직 뜨거운 예술혼이었습니다.
영국 6펜스 은화. 1962년 발행달과 6펜스 동전은 모습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물간의 대조가 더 극적입니다.
영국은 1970년대 초까지 12진법을 이용한 동전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때는 6펜스 동전이 흔하게 사용되었지요.
그 후로는 10진법으로 100펜스가 1파운드가 되었습니다.
(12진법은 지구상의 여러 문화권에서 사용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1년 12달이다. 즉 1년 중 달의 차고 기움의 횟수가 여러 분야에 적용되었다.)
그 당시 6펜스 동전의 쓰임새는 보통 아이들이 교회 헌금으로 내는 액수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동전이 당시의 가장 최소한의 사회적 가치와 효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환율이 아닌 현실적인 감각을 고려하면 우리 동전으로는 50원 내지는 100원짜리로 여기면 될 듯도 싶네요.
타히티의 여인들. 폴 고갱. 1891년폴 고갱은 프랑스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생명력과 원주민들의 토속적인 아름다움으로 특징됩니다.
그는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 안식처를 마련하고 만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변하지않을 색감을 찾아냈고 고대인의 표정을 발견했습니다.
작품속 붓터치를 보면 그의 영혼이 진정한 평화를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지용 시인은 <유리창>에서 외로운 심사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
(조선지광 89호, 1930.1)
시인이 홀로 밤의 유리창에서 닦아내는 것은 바로 <슬픔>입니다.
글쓰기란 자신의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것들을 어루만지며 소매로 문지르는 행위일 것입니다.
오늘 밤도 고갱의 달을 바라보며 글을 매만지고 있을 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 밤의 위로를 만들어갑니다.
내가 내 자신의 즐거움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글을 쓴다면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달과 6펜스, 윌리엄 서머셋 모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