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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친절함이 나에게 씁쓸함으로 다가오는 이유

오만하던 그들이 한정판 친절 로봇으로 변신한 진짜 이유  

B가 A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부를 묻는 상투적인 인사였다.  

몇 년 만의 연락이었다. 


대학교에서 1년 간 같이 다녔지만 졸업하고서 서서히 멀어졌었다. 

A는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저 결혼해요


머릿속에 ‘역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 안부를 물은 것은 결혼소식을 전하기 전에 의례적으로 건네는 인삿말이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미묘한 실망감을 다독였다. 

좋은 일이니까 이런 감정은 잠시 감추자. 


그랬구나.축하해


우호적이면서도 간결하게 답장을 보냈다. 


결혼식에 올 수 있냐는 말에 A는 대답을 망설였다. 

갈 수 있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나는 너의 결혼식에 가지 않을 거야’ 이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B의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쑥 B가 말을 꺼냈다.  


B는 오매불망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통화 연결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저 때문에 많이 참았을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참았다’의 목적어는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A는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느껴왔던 불편함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와의 대화가 불쾌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없이 툭 나온 저 말. 


B가 A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인정하는 것일까. 

걔가 나쁘게 행동하는 건 아닌데, 그 사람과 대화하고 뒤돌아서면 기분이 묘해지는 경우 말이다.


B와 대화할 때마다 맥이 빠지곤 했었다. B가 나를 은근히 삐딱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학원에서 B와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 시간이 흘러, 나와 B은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고, 같은 반이 되었다. 그리고 1년 뒤 B와 함께 대학교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처음에 B에게 별 생각이 없었다. 평범하고 활달한 동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B에게 점점 화가 났다. B의 대화방식 때문이었다. 

이 영화 봐요
이거 이렇게 해요
저건 저렇게 해요


B는 나에게 종종 지시적인 말투로 영양가 없는 잔소리를 했다. B는 나를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으로 착각했던 걸까. 나의 행동을 굳이 교정하려고 애쓰는 B의 동기는 무엇일까. 

B는 상대를 조종하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높였다. 


 수시로 화가 났지만 참았다. B에게 이런 속마음을 말한 적이 없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B와 대화하면, 나는 불쾌하다. 그런데 불쾌해하는 내가 이상한 건지, 나를 자신의 방식대로 바꾸려는 B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


 당연히 B가 선을 넘는 거다. B은 멋대로 내 영역을 침범하려고 했다. 

당시에 이 감정이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어렴풋이 불쾌할 뿐이었다.

확실한 건 B와 대화하면 마음이 가라앉을 때가 많다는 거였다. 나는 서서히 B의 모든 잔소리에 침묵과 무대응으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반응하지 않는 것도 암묵적인 거절이다. 침묵은 또 하나의 메시지이다. 나를 불쾌하게 하는 상대는 꾸준히 거절할 필요가 있다.

B는 서운해했다. 

“왜 나한테 자기 얘기 안 해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B는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조언이란 이름으로 엉성하게 포장한 말에 상대가 반응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 


“D영화 봤어요? 내가 D영화 보라고 해서 일부러 안 보는 것 같아.”

나만이 앉을 수 있는 운전대 앞이기에 타인이 빼앗으려고 할 때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우로 갈지 좌로 갈지는 내가 정한다.

B는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D영화를 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봤냐고 나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다.


 별 것도 아닌 부분에서조차도 나를 자신의 통제 영역 안에 두려고, B은 안간힘을 썼다. 내 옷깃을 붙잡고 조종하려고 했다. 그럴수록 나는 B를 멀리할 뿐이었다. 결국 B의 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B는 나를 미워하게 됐다.   

듣고 싶은 것만 들어

언젠가 B가 동아리 모임에서, 나를 겨냥해 큰 소리로 불평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는 듯. 그 말을 듣고 옆 사람이 야비하게 키득거렸다. 


B는 간헐적으로 열리는 동아리 모임에서 기회만 되면 큰소리로 나를 나쁘게 평가하는 말을 했다. 동아리 단체 대화방에서도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올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줬다.

그런 B가 몇 년 만에 연락이 온 거다.  

“저 때문에 많이 참았을 것 같아요.”

B는 뜬금없이 저 말을 꺼냈다. 제 발이 저렸나 보다. 결혼식에 안 올까 봐 지레 불안했을까. 만약 결혼식이 없었다 해도 B가 나에게 저렇게 숙였을까. 

여인의 얼굴은 인조 나비에 가려져 있다. 여인의 진심은 인조 나비 너머 표정이 아닐까. 저 나비를 걷어내고 그 표정을 확인하고 싶다. 그것이 그녀의 진심일 테니까

우리 동네에서 B를 만났다. 같이 밥 먹고, 차도 마셨다. B은 이전과 달리, 시종일관 친절했다. 어쩌면 오랜만에 만난 내가 반가울 수도 있다. 우리는 잘 얘기했고, 잘 헤어졌다. 정성스럽게 꾸민 결혼 초대장도 받았다. 축하한다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리고 나는 B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꽤 무례했던 B에 대한 나름의 보복이었다.   


대학교 친구이던 C도 떠오른다.  

C는 사춘기 때 외국에서 힘들게 생활했었다. 그 경험은 C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다. 그 기억을 C가 말했었고, 내가 대답했었다. 그런데 나의 대답이 C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었나 보다. C은 갑자기 “너는 내 상대가 안 돼.” 라며 나를 깎아내렸다. 


C은 감정이 상하자 평소 자신이 품었던 선입견을 마구잡이로 뱉어버렸다. 나는 C와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실 마음속으로 C는 나를 차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C가 던진 짱돌은 꽤 아팠다.  


그랬던 C가 나에게 연락했다. 예상했지만 결혼식이었다. 나는 문자함에 막 도착한 온라인 결혼식 초대장을 열었다. 선한 눈매의 예비신부와 과거보다 살집이 붙은 C의 사진이 보였다. 그도 연락한 것 자체가 민망했는지 꼭 오라는 건 아니고 다만 소식을 알리는 거라고 덧붙였다. 축하한다고 답장했다. 웃음 이모티콘과 함께. 


자신의 상대가 안 된다고 했으면서, 그 상대를 결혼식에는 왜 부르는가. 괘씸했다. 그리고 반가웠다. 큰일을 앞두고 무려 10년 전 친구였던 날 기억해 내다니. 감동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마음이 이리저리 기우뚱거렸다. 

태도도 선택하는 것이다. 그들의 태도가 그들의 본심이다.

 친절하게 배려할 줄 아는 그들은, 상대를 불친절하게 대하기로 ‘선택’했었다. 그들은 나에게 노력하지 않았다. B와 C의 과잉된 상냥함은 오히려 그들이 예전에 저지른 잘못을 확인 사살하는 계기였다. 결혼식을 앞두고 난 그들에게 모처럼 대우받고 있었다. 그래서 씁쓸했다.


친절한 게 별 거 아니다.

청유형의 말투를 써서, 상대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는 것.
상대를 수시로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 
상대를 무시하려는 어리석은 마음이 들어도, 상대가 귀하다는 진실을 붙드는 것.
상대와 동등하다는 마인드를 갖추는 것.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상대를 입체적인 인격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내키는 대로 뱉은 말이, 상대의 기억에 어떤 모양으로 박제될지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 자에게 배려는 먼 나라 이야기이다.  


친절한 사람도 교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대를 시혜적으로 대할 때 그렇다. 본인이 높은 위치에서 상대를 내려다봐야 마땅한데, 은혜를 베풀어 낮은 위치로 내려온다는 망상이다. 그건 또 다른 차별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말의 머리에 사람의 다리가 붙어있는 기괴한 형상을 본 것 같아서다. 

부드러운 말씨 속에 상대를 향한 배타성이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내가 너와 이렇게 마주 보고 동등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내가 나름대로 선심 쓰는 거야."

결국, 마음이 문제다. 둥근 말투를 써도 속마음이 오만하다면 상대는 언젠가 안다. 그 본심을. 마음은 온도처럼 전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친절은 일시적일 것이다. 그들은 결혼식을 위해 불손한 태도를 버린 척할 뿐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나는 그들을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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