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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받고 싶은 자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당하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인내하며 정을 줄 필요가 없다. 딱 거기까지만.

 F는 회사에서 알게 된 사람이다. 첫 사회생활을 하는 F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노는 무리도 달랐다.

 

 6개월 뒤 처음으로 F와 외근을 갔다. 어쩌면 F와 친해지는 계기일 거라 예측했다. 익숙한 표현을 쓰자면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F는 직무 특성상 카메라를 갖고 다녔다. 회사 로비를 나가는데 돌연 F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째려봤다. 별로 대화한 적도 없어 잘 모르는 사이였다. F가 나를 미워하는 게 뜬금없었다.


당황하는데 F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언니 오빠들은 나랑 일할 때 삼각대 들어주는데, 왜 A는 안 들어주냐?”

"내 삼각대를 들지 않으려고 하는 게 기분 나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다른 사람은 자발적으로 내 삼각대를 들어주려고 애쓰는데?"

 한 마디로 내가 자신을 보조해주지 않아 기분 나쁘다는 말이었다. 나보다 키가 크고 건장한 F는 혼자서도 충분히 삼각대를 들 수 있다. 몇 명이 F가 어린 여자랍시고 편의를 봐준 것 같았다. 


나는 F의 삼각대를 들어줄 의무가 없었다. 나의 직무 중 삼각대 들기는 없었다. F가 나에게 그런 배려를 원했다면 정중히 부탁하는 게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태도였다.


F는 상대가 마땅히 행할 의무를 져버린 것처럼 굴었다. F는 짐을 들라고 기세 등등하게 요구했다.
   

F를 이끌어주고 싶던 마음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F에게 상처주기 싫었던 나는 말없이 삼각대를 들어주었다.


 결론적으로 이후 F와 일하며 삼각대를 들어준 적은 없다. 나는 교통사고로 목과 어깨에 이상이 생겨 침을 맞으며 추나요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삼각대를 든 이후 그 지점에 통증이 재발했다.

 나를 경멸하던 F는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F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F와 친해지고 싶었다. 비정한 사회에서 상처 받을 F를 따듯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의도는 F에게 무형이었다. 내 마음을 얼핏 느꼈더라도 F에게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F는 막 나갔다.
F는 환멸에 찬 목소리로 반말을 찍찍하며 소리를 질렀다.

 

 촬영 중 F가 신발 끈을 묶어야 하니 카메라를 들어달라고 했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들어줄 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F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상대를 얼마큼 싫어해야 저 표정이 나오는 걸까.


F는 나를 째려보며 큰소리를 냈다.  

 “카메라 하나도 못 들어주냐?”

 카메라를 들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F는 이해 못 한 것 같았다.


 언젠가 F와 농가에서 촬영을 했다. F가 풍경을 찍다 돌연 뒤돌아 또 나를 노려봤다. 상대를 혐오해 마지않는 표정이었다.


촬영하는데 내가 본인 옆에 붙어있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촬영 담당인 F가 재량껏 풍경만 담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코치하는 것도 아닌데 옆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야 D직군 소속 누군가가 F의 앞에서 나에 대한 험담을 했었다는 걸 알았다. 이것도 내 앞에서 F가 이죽거리며 실토한 거다. 이런저런 이유로 F는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F의 호전적인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F의 태도를 받아줄수록, 그는 기고만장해져서 제멋대로 굴었다.


 내가 사무실에서 일던 중에 F가 맞은편 사람을 만나러 온 적이 있다. F는 그와 수다를 떨었다.

 좁은 공간에서 개인사로 떠들 거면 일하는 사람을 배려해 나가는 게 예의인데, F는 그러지 않았다.


재잘거리던 F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인기척을 느꼈지만 나는 일하느라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F의 눈빛과 표정이 어떤 종류인지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F의 행실에 대한 데이터가 쌓인 터였다.


처음에는 친하지 않은 상황에서 F가 나를 경멸하는 게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니까?” 누가 모르겠는가. F가 제삼자에게 말하는 척하면서 나를 겨냥한 채 말을 뱉었다. 그런 F의 태도에 없던 정마저 떨어졌다.  

장님은 코끼리를 만져도 코끼리인지 모른다. 손의 촉감으로만 도대체 무엇을 알까?

 F는 나를 적극적으로 관찰하며 싫어했다. 숙제를 하는 학생처럼 성실하게싫어했다.   

 내가 회식 때 빨리 자리를 뜨는 것, 퇴직하는 동료에게 친근하게 얘기하는 것, 외근하는 시간을 메신저에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 타사 관계자의 커피 대접을 거절하는 것 기타 등등. 누구나 할 법한 행동을 할 뿐인데도 F는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F는 나를 환멸 하기로 결정하고 나름대로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정보를 프레임에 우격다짐으로 끼워 넣었다. 그렇게 F는 자신이 나를 싫어하는 감정을 정당화했다.  


 심지어 내가 외부 관계자와 인터뷰하기 전 화장실에 가고, 인터뷰를 마치고 화장실에 한 번 더 가는 것까지 F는 비꼬았다. 인터뷰 장소에서 회사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한 건데 F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던 F는 회사 차를 타고 외근을 가던 중 고속도로를 앞전에 두고 배가 아팠었다. F의 배에 신호가 오자 운전하던 사람이 황급히 화장실을 찾는 에피소드까지 있었다.


 F는 술병으로 차 타는 내내 죽을상이던 적도 있었다. 촬영 장소에 도착하자 F는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 F가 구역질하는 소리가 옆에서 다 들렸다. F의 입에서 쏟아진 이물질이 수세식 변기 물에 후드둑 떨어졌다. 나는 그런 F를 걱정했다.  

 

그런 나를 F는 함부로 대했다. F가 화장실에서 그럴 때 내가 걱정했다는 걸 알았다면? F는 정신을 차렸을까.


그래도 F는 여전했을 거다. 누군가가 싫어지면 그 마음이 희석되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친절한 태도를 유지해 F의 닫힌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나의 부드러운 태도는 F의 불손함에 불을 지폈다. F의 시건방짐은 서서히 일상적인 태도로 자리 잡았다.

F의 태도는 노골적이었다. 냅다 노려보기. 소리 지르기. 짜증 내기. 면박 주기. 험담했다고 암시하기. F는 터지기 직전 시한폭탄 같았다

 나는 본의 아니게 F에게 상처 준 적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카페에 갔었다. 거기에 F도 있었다. F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차를 사겠다고 했다. 사람들에게는 늘 내가 사는 편이었다. 먼저 사겠다고 하는 F가 기특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오, 네가 웬일이야?”

드디어 나왔다. F의 표정이. 나쁜 의도는 아니었지만 F가 듣기에는 안 좋은 말이었다. 나는 상대방이 오해해도 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민망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게 아닌데...

 

 “하하. 언니가 쟤 이상한 사람 만들었어.”

옆 사람이 거들었다. F는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환멸 하는 심정을 나는 차라리 이해하고자 했다.


 F는 B직군에게 불만이 많았다.

 B직군이 일을 가져오면 내가 있는 C직군과 F가 있는 D직군에게 부분적으로 할당되었었다.


F는 B직군이 처리하기 귀찮은 일을 C직군과 D직군에게 떠넘긴다고 해석했다. F는 툴툴거렸다.  

 “그 일은 B직군이 해야지. B직군 E는 내가 일하는 시간에 운동하면서 얼굴 책에 셀카를 올렸었다니까? 내가 일을 하고 왔는데 사무실에 E가 있더라고. E가 일을 나가야지.”


 일이 공정하게 굴러가지 않는다고 F는 주장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일마저 안 한다면 F는 회사에서 놀게 된다. 아침마다 회사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정성스레 화장하던 F는 더 많은 여유를 누리고 싶던 걸까. 사실 F는 불평할 입장은 아니었다.


 F는 쓸데없는 짓을 하곤 했다. 회사는 외근하는 사람에게 식대를 제공했었다. 외근하는 당사자가 자기 돈으로 사 먹고 영수증을 끊어온다. 그럼 회사에서 영수증 액수만큼 당사자에게 되돌려준다.


관건은 '상황적으로 정말 필요할 때 그 시스템을 활용하느냐.'였다.
F는 그러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오후 3시까지 외근 장소에 도착한다고 가정하자. 그럼 F는 출발시간보다 먼저 나와 외식을 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어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F는 고의적으로 일찌감치 나가 굳이 점심을 사 먹었다.


 아니면 F는 의도적으로 점심을 안 먹고 외근했다. 그리고 그 핑계로 외근을 마친 뒤 자신이 찍은 음식점으로 갔다. F는 인위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F는 회사에 더 늦게 들어갈 구실도 생기고, 평소에 먹고 싶던 음식도 맛볼 수 있었다. 


 심지어 해당 영수증을 청구하면 액수만큼 개인통장에 입금됐다. F에게 일석삼조였다. (업무 특성상 F는 외근이 잦았다) F는 그렇게 모은 ‘영수증들을’ 고스란히 회사에 제출하고 값을 받아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F의 상습적인 행동은 양심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F가 구실을 만들어 사 먹자고 할 때 거절했다. 나는 차라리 회사에 청구하지 않되 사비로 사겠다고 했다. 재밌게도 F는 그런 제안마저 혐오했다.


 “우리 돈 안 내고도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데, 왜 싫다는 거야? 우리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는데.”


 F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F는 누군가가 자기 돈을 그렇게 사용했다면, 그 누군가가 정의롭지 못하다며 길길이 날뛰었겠지.

내가 F의 제안을 찜찜해 하자, F는 어이없어했다. "됐어. 내가 긁을게." F는 불필요하게 카드를 긁었다

 알고 보니 F는 D직군 사람들이 하던 못된 관습을 따라한 거였다. F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옳지 못한 행동을 망설임 없이 실천했다. 남들도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나는 그런 F의 철없는 행동을 어리다는 이유로 용서했다. 상처 주지 않으려 했다. 그 사실을 F는 간과했다.  


F와 잘 지내고 싶은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다. 노력하면 언젠가 알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F는 나를 근시안적으로 왜곡하고 비아냥거렸다. F는 삐뚤어진 방식으로 빈곤한 내면을 드러냈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을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F에게 "당연히 저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막 행동해도 괜찮아."라는 인식이 생겼다

 인간관계에서는 종종 진심보다 외적인 요소가 상대방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F가 C 소속 G팀장에게 호되게 깨져 운 적이 있다. 한동안 G팀장은 F를 울린 남자로 불렸다. 내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깐죽대던 F는 실전에서 맷집이 없었다. F는 G팀장을 한동안 경계했다. F는 G팀장을 싫어했지만 정작 그 앞에서는 티 내지 못했다. 


나는 F의 미성숙함을 방관했다. 지적해서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빈틈이었다.


내가 아무리 상냥하게 대해도 F는 말괄량이처럼 심술을 부렸다. 그러나 F는 자신을 꾸짖는 G팀장에게는 오히려 예의를 갖췄다.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지 않으면 만성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는 표현을 거침없이 한다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F는 싫다는 티를 팍팍 냈다. F에게 나의 감정은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내키는 대로 그가 표현한다면, 나는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는 게 낫다. 굳이 마음을 돌리려 할 필요 없다.


F가 동생이라고 감싸려 한 게 독이 됐다. F는 만성적으로 신경질을 냈다.


F의 불친절은 나의 친절을 먹고 자랐다.

 그렇다면 나는 노선을 바꿔야 했다. 정색하고 선 넘지 말라고 경고해야 했다. 


 인간은 누구라도 누구든지 싫어할 수 있다. 자유의 영역이다. F가 나를 괴롭히는 건 죄이다. 그러나 F가 나를 싫어하는 건 죄가 아니다.


왜 나를 싫어하면 안 되는가. F는 의지적으로 자유롭게 나를 판단하고 싫어했을 뿐이다. 그리고 F도 누군가에게는 미움받는 사람일 것이다. 


인간관계에도 상황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

 선한 의도로 대한다고 상대는 무조건 마음을 열진 않는다.


인간관계는 수학공식이 아니다.

내가 선의로 대할수록 상대는 악의를 가질 수 있다. 오히려 괴롭힐 빌미를 주기도 한다.


내가 정석으로 대해도 상대가 계속 배타적으로 나온다면, 최대한 접촉을 줄이거나 손절하는 게 이롭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도 좋은 열매를 보기 힘들다면 다른 땅을 개간하는 게 유익하다. 그렇게 에너지를 아껴야 좋은 사람들이 나타날 때 잘 지낼 수 있다.


 서로 목적이 맞아야만 친해질 가능성이 크다. F는 나를 ‘어디 이 상황에서 A가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라는 태도로 대했다. 싸늘하고 경직된 심리였다.


 F는 나와 친해지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비난거리를 찾아내 나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을 합리화하는 게 목적이었다.

 서로 목적이 달랐기에 나와 F는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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