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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자기표현은 마음의 스크래치를 줄이는 기술이다

“한 상자에 30개라니까!” 안경점 직원이 반말한 진짜 원인은?

일회용 소프트 렌즈를 사러 갔다.

15년 전 잠깐 하드렌즈를 착용했었다. 소프트 렌즈를 사러 안경점에 간 건 처음이다. 안경직원인 B에게 렌즈에 대해 물었다. 기본 렌즈는 25,000원이었다.


나: 몇 개 들어 있나요?

B: 한 상자에 30개 들어있어요.

나: (오른쪽과 왼쪽 눈에 각각 1개씩 넣으니까, 2개를 1세트로 지칭하는 건가?) 2개를 1개로 친 건가요? 그럼 다 합해서 60개인 건가요?

B: 한 상자에 30개라니까.

나: (그 뜻이 아니고 다른 뜻으로 물은 건데)...

B: 한 상자에 30개씩이라니까!  


 B는 큰 소리로 반말을 했다. 나는 당황했다. 설마 한 상자에 30개가 있다는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던 건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한 상자에 30개인 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에 오른쪽 눈과 왼쪽 눈에 넣는 거니까, 그걸 감안해 30회 사용인지 15회 사용인지 물어보는 겁니다.  


  소프트 렌즈에 관심이 없었기에 정보를 잘 몰랐다.  

  B는 질문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B가 오해한 지점을 내가 추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B의 나이가 나보다 많았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통상적으로 존댓말이 기본이다. 목소리를 그렇게까지 높일 사안도 아니다. 의도를 재차 말하기에는 나는 감정이 상했다. 그리고 그 가게에서 렌즈를 사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내가 한 번 더 의도를 설명해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B가 발끈한 원인은 나의 부연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가 차근차근 본뜻을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면서 서로의 의도를 잘못 인지하는 일은 흔하다. 오해하는 사람의 반응이 뜨악해도 당사자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왜냐면 듣는 사람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일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러니 개의치 말고 나의 의도를 뚝심 있게 끝까지 설명해야 한다.

1. 발화자의 의도가 청자에게 잘못 전달됐다.
2. 발화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청자가 당황한다.
3. 청자의 당황에 발화자가 당황한다.
4. 어떻게 설명할지 말을 고르던 발화자가 그 순간 아무 말도 안 한다.
5. 그러므로 청자는 발화자의 의도를 곡해한 채 상황이 종료된다.

 

이런 상황은 되도록 만들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예기치 못한 반응을 이겨내며 차분하게 설명하는 건 제법 세심하게 힘을 써야 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무익하지는 않다.


 이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내가 회사에 재직하던 중 C언니가 입사했었다. 내가 업무 설명을 해야 했다. 서로 호명해야 하니, 당장 빠르고 간결하게 호칭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야 탈이 없다. 

어떻게 호칭할지 C언니의 의견에 내가 따라가는 게 맞겠다 싶었다. 나름대로 B언니에 대한 배려였다. 그래서 물었다.   
나: “혹시 저를 뭐라고 부르실 건가요?”
C언니: “... 선배라고...”
나: (내가 왜 선배지? 선배나 후배 개념이 아닌데. 그리고 C언니가 나를 선배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데)“... 언니는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훗날, 당시 상황을 C언니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할 수 있었다.

 

 C언니는 D 플랫폼에서 글을 썼었다. 언젠가 C언니는 글에서 살짝 나를 언급하고 싶다고 했었다. C언니의 연락에 나는 흔쾌하게 정보를 제공했다. 이후 C언니가 나에 대해 쓴 글을 봤다. 글 바로 위에 이렇게 써져 있었다.


후배 작가들아, OOOOO’


 C언니는 나를 ‘후배’라고 호명했다.  ‘작가’라고만 해도 충분한데, 왜 굳이 ‘후배’라는 개념을 집어넣었을까.

다수인 선배 작가들에게 말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호칭 정리 시, 내가 질문을 가장한 ‘선배’ 호칭 강요를 했다고 C언니는 믿었던 걸까. ‘후배’라는 단어 하나에 호칭과 관련된 기억이 소환됐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해였다.


  나는 당연히 C언니를 언니로서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나의 인정을 받든 지 안 받든 지, B언니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배려가 불필요한 오해를 불렀던 걸까. 마음이 상했을 C언니에게 미안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할 걸 그랬나 싶었다. 부연설명을 했다면, C언니도 나의 진심을 투명하게 알았을 텐데.


 지나가는 순간들이 마음에 남을 때가 있다. 당시엔 ‘어? 뭐지?’ 했는데, 그 이후 마음에 맺혀 가끔씩 떠오른다. 특히 오해받을 때가 그렇다.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그 오해는 사실로 둔갑한다.

 모든 일에 진심을 말할 필요는 없다. 때로 오해받고 오해하며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노력해서 본심을 말하는 건 건강한 일이다.  


 제삼자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에게

“왜 그런 걸로 그렇게까지 해?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가버려.”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반응은 제삼자의 시선일 뿐이다. 어떤 경우이든 오해받는다고 인지해 자발적으로 변호한다는데 누가 말릴쏘냐. 제삼자는 말릴 권한이 없다.
당사자는 제삼자의 시큰둥한 반응을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가면 된다.”

 

삶의 작은 조각들이 모여 인생길이 된다. ‘그런 것 따위’는 결코 ‘그런 것 따위’가 아닐 때가 많다. 한 마디의 말도 의미가 있듯이, 인생 속 하나의 시퀀스도 다 의미가 있다.


매 순간 우리는 상황의 의미를 해석하고 기민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런 태도가 자신과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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