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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의 슬픈 연대기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그들의 역사를 보면 반드시 '착함'을 버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착함’의 정의는 무엇일까.

사회의 암묵적 합의로 이루어진 ‘착함’의 정의를 보겠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

친절한 사람.

좋은 말만 하는 사람.

부당한 대우를 참는 사람.

할 말을 못 하는 사람.

이타적인 사람.

피해를 주면 미안해하는데, 피해를 받으면 괜찮다고 하는 사람.

잘 웃는 사람.

착한 사람은 이타적이어서 자신보다 남의 감정을 돌보려고 한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선호한다.

사람들은 못된 사람을 기피한다.


착한 사람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착한 사람은 나에게 쉽게 상처 주지 않는다.


내가 부당하게 행동해도 날카롭게 말하지 않는다.


나를 판단하기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한다.


그러므로 부담 없이 나답게 행동할 수 있다.

착한 사람은 상대의 좋은 면을 위주로 본다. 그래서 상대가 좀 더 편안하게 감정을 드러낸다

그럼 나답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속마음을 있는 거르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덜 하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과 절망과 증오와 질투와 보복심과 교만함을 누르지 않고 표출하는 것이다.


나의 개성과 생각을 가치 판단하지 말고 수용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거절당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신경 써서 나를 꾸미지 않아도 된다.

착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써서 이웃을 지지한다

맞다. 착한 사람은 쉽게 거절하지 않는다.


거절하면 상대가 상처 받는 걸 알기 때문이다.


거절은 나쁜 닌데도, 착한 사람은 거절을 알아서 선택하지 않는다.


굳이 거절할 이유를 찾 못해서 거절하지 않기도 한다.


만약 거절하게 되면 오히려 미안해하며 상대의 기분을 살핀다.


그럼 상대는 더 의기양양해져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착한 사람의 거절은 쉽게 거절되기도 한다

착한 사람은 남의 행동에 섣불리 훈수 두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잘못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스스로 깨닫기 힘들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서 훈수까지 들으면 인간은 분노한다.


설령 자신이 잘못했다고 해도 비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받길 바란다.


이런 기대에 착한 사람은 잘 부응한다.

"그래. 너도 많이 힘들고 아프니까 그랬을 거야." 드넓은 이해심으로 착한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착한 사람은 인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한다.


자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 없으면서, 무의식 중에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그게 인간의 한계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대부분 한계가 있다

착한 사람은 그런 인간의 한계 도전하는 사람이다.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든 포용하며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하려고 한다.


인간 ‘그 자체’에는 나쁜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런 것조차용납하려고 한다.


인내와 헌신이 진정한 사랑의 상징이라고 착한 사람은 믿는다.

착한 사람은 사랑의 순전한 의미를 실천하려고 한다

그렇다. 착한 사람은 맨발로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산악가이다.


착한 사람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한다.


착한 사람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려고 한다.


착한 사람은 끊임없이 상처 받으면서도 그 길을 가려고 한다.

차가운 눈이 가득한 산에서 맨발로 걷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다

슬픈 건, 착한 사람의 고군분투를 세상은 모른다는 거다.


착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착하게 행동하는 줄 안다.


착한 사람도 착하게 살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걸 세상은 모른다.


슬픈 건, 착한 사람의 고군분투를 세상이 안다고 해도 무의미하다는 거다.

선이 끊어진 전화기처럼 세상은 착한 사람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세상은 착한 사람에게 착하게 살라고 한 적이 없다.


세상은 착하게 사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착하게 사는 걸 세상이 눈치채도, 그에게는 별 감흥이 없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착하게 살다가 상처 받으면, 세상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착한 사람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가시밭길일 뿐이다.


가시밭길에는 당연히 가시가 있다. 찔리게 된다.

문제는 가시에 찔린 사람만 아프지, 그 가시로 찌른 사람은 아프지 않다는 거다

가라고 한 적 없는 길을 네가 스스로 가지 않았냐고 세상은 되묻는다.


결국 착한 사람은 무리하다가 지치게 된다.


지쳤기 때문에 예전처럼 힘을 쓰지 못한다.


사회는 지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착한 사람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모진 세상에 후려침 당한 착한 사람은 스스로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잠가버린다

착한 사람은 왜 지쳤을까.


나쁜 사람도 무조용납하려 했기 때문이다.


비판하지 말고 수용만 해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판하지 않으면, 분별하지 않게 된다.


분별하지 않으면, 나쁜 것들도 떠 앉게 된다.


나쁜 것들로 고통을 받아도, 이미 벌어진 일은 수습이 어렵다.

나쁜 사람이 슬며시 건네는 나쁜 것들은, 과감히 쳐내야 한다

착한 사람은 선을 긋지 않는다.


나쁜 사람이 선을 넘어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 한다.


그게 착한 사람의 실책이다.


착한 사람의 수용 아래 나쁜 사람의 만행은 반복된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나쁜 사람이 있냐며 착한 사람은 결국 분노한다.


그런데 이미 착한 사람 주변에 나쁜 사람은 많았었다.

세상은 사실 악으로 넘쳐난다

나쁜 사람은 자신이 나쁘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냈었다.


다만 착한 사람은 나쁜 사람의 결점마저 인내로 덮어,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쁜 사람의 실체를 직관한 착한 사람은 결국 세상에게 보내는 선한 지지마저 철회한다.


착한 사람은 나쁜 사람을 아껴주려다가, 나쁜 사람으로 인해 무너진다.


그러므로 ‘착함’으로 인생을 도배할 필요가 없다.


착한 사람, 세상도, 그 누구도 유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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