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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권력자가 됐을 때 얻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들

'내 말이 틀리다고?' 북한도 아닌데 의견이 다르다고 화부터 내는 상사

한 인간의 본성은 권력을 손아귀에 움켜쥘 때 드러난다고들 말한다. 


권력자가 나쁜 게 아니라, 권력을 장난감처럼 생각해서 제멋대로 갖고 노는 인간들이 문제다. 권력이라는 손님이 인생에 등장할 때, 우리는 그를 조연으로 삼을지 주연으로 삼을지 결정해야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추구한다. 그래서 승진의 컨테이너 벨트에 탑승하려고 몸을 사리지 않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계급의 계단을 최대한 빨리 올라가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사실에 기반한다. 아주 합리적인 신앙이다. 권력을 가지면 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요소들을 얻는다.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관심이다. 사람들은 아닌 척하면서 권력자를 선망하고 경계한다.      

선망하는 이유는 나도 권력자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다. 


권력의 분배로 매겨지는 서열 속에서 누구나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싶어 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개인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가 가진 ‘권력’ 이란 생물을 주목한다. 


경계를 하는 이유는 권력자에게 찍히면 회사생활이 험난해지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는 주로 상사다. 물론 좋은 상사도 많다. 하지만 나쁜 상사도 많다. 문제는 내가 상사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랜덤 인형 뽑기처럼 어떤 성품과 능력을 지닌 상사를 만나든지 일단 그를 감당해야 한다. 아니면, 회사를 포기하거나. 

인형이 너무 불량품이면 교체할 가능성도 있지만, 교체가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겠다. 


더군다나 회사에서 받는 월급은 나와 가족의 안위를 의미한다. 돈줄은 밥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인간답게 사는 묘수는 없다. 또 다른 곳에서 밥줄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전까지 나만 고스란히 마음고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상사의 눈에 어긋나지 않는 직원, 상사의 마음에 드는 쏙  직원이 되고자 처세술을 활용한다. 


주된 처세술은 권력자가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하는 것이다. 판단력을 자발적으로 땅에 묻어두고, 권력자의 의견에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권력자는 인정받는다고 느낀다.

권력자에게는 그게 중요하다. 인정. 이 치열한 사회에서 한 자리 차지했다는 것은 이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낙하산과 인맥 승진은 제외하고. 


하지만 입지를 굳힌 권력자더라도 여전히 인정받고 싶어 한다. 기존에 받은 인정보다 더 양질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인정 욕구는 끝이 없다. 화선지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어느새 권력자는 사람들의 호응에 익숙해진다. 권력자가 본인의 말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당연시한다면, 장차 큰 위험에 직면하는 지름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검은색이라면, 흰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검은색만 보인다고 흰색이 없는 게 아니다. 흰색도 있지만 검은색뿐인 세상이라 흰색이 안 보이는 것뿐이다. 


편협한 사람들은 세상이 온통 검은색인데 흰색이 웬 말이냐고 비웃으면서, 무작정 흰색을 부정한다. 애초에 검은색뿐인 세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설령 있다면 그런 세상은 병든 곳이며 인간이 살 수 없는 행성에 불과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나의 말에 찬성만 한다? 정말 나의 의견이 기가 막히게 맞다고 상대가 생각하는지 권력자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입으로는 권력자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하면서 표정이 어두운 직원은 없었는가. 직원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 대충 넘어갔던 것 아닌가. 


직원이 어쩔 수 없이 기계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을 다 알았던 것 아닌가. 직원이 반대하기 꺼려하는 모습을 감상하며 앙상한 우월감에 도취했던 것 아닌가. 

점점 권력자는 자신의 소망이 투영된 망상으로 현실을 빈틈없이 덧칠한다. 망상 속에서 권력자는 그럴싸한 영웅이다. 


권력자는 모든 상황에서 다 맞는 말만 하고, 늘 합리적인 선택만 선포한다. 너무 유능해서 애초에 다른 사람의 의견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대를 반대하기에 진정한 반대를 경험하지 못한다.   

만성적인 망상의 부작용은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냉정하고 차가운 현실을 직면할 정신적인 힘이 사라진다. 

마치 몸을 움직이지 않아 근육이 퇴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근육이 빠지면 체력이 약해진다. 작은 충돌에도 부실한 몸이 큰 타격을 받는다.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파서 장거리를 뛰지 못한다.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닫아버린 권력자는 더 이상 사람들과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 물론 권력자 입장에서는 우매한 백성들이 짐의 원대하고 깊은 뜻을 잘 모르는 현상으로 읽힐 것이다. 

결국 권력자는 사람들과 더 멀어지고, 결국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독방이 전부인 줄 제대로 착각한다.  


권력자가 타인의 긍정에 하염없이 익숙해지는 현상은 답정너 정신의 탄탄한 기초가 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답정너 가치관을 가진 오만한 권력자. 답정너 가치관에 가스 라이팅 된 권력자와 소통하는 사람. 둘 중 누구에게도 유익이 없는 게 답정너 정신이다.           

본인이 문제가 뭔지 알고, 문제에 대한 최선의 답도 안다면 회의를 뭐하러 하는가. 왜 회의에 쓸데없이 사람을 부르는가. 바빠 죽겠는데. 본인이 무엇이든 가장 잘 알면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회의실에 오는 대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멋진 나를 향해 한 번씩 웃어 준 다음 미러전을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뭐하러 죄 없는 사람을 허깨비처럼 세워두고 실없이 업무 얘기를 꺼내는가. 타인의 시간을 함부로 뺏는 비효율적이고 무례한 행동이다.

소위 지칭하는 '아랫사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 권력자의 자존심은 크게 다친다. 내 말이 다 맞는데, (감히) 아니라고 해? 반대의 근거나 배경과는 상관없이 일단 권력자는 '반대'라는 현상 자체에 함몰되곤 한다. 


이때부터 권력자는 자신이 권력이라는 건물의 주인임을 각성한다. (사실 세입자인데) 아니, 원래부터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다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때, 권력이라는 히든카드를 위풍당당하게 꺼낼 수 있다는 현실을 한번 더 자각한다.

그래서 가끔 삐딱선을 탄 권력자들이 직장에서 그렇게 갑질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권력의 사춘기가 온 것이다. 사춘기를 겪는 사람들의 행동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특징이 있다. 가끔 촉법소년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우리는 기함을 한다. 실실 웃으면서 또래 친구를 폭행하고 기절놀이로 기절시키는 학생들이 인간인지 악마인지 분간이 안 된다. 

    

바람결에 아무 데로나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처럼 권력의 검은 유혹에 맥없이 휘둘리는 불쌍한 권력자.            

불쌍한 권력자가 저지르는 갑질의 내용은 다양하고 현란하고 유치하고 치졸하다.
            

회의 때 직원이 아이템을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우긴다. 충분히 정중하게 보낸 업무 메신저를 보고도 더 친절하게 말해야 한다고 칭얼댄다. 왕자, 공주 대접이라도 받길 바라는가. 군대식으로 각을 세워 보낸 메시지인데 뭘 더 바라는가. 애교라도 부리라는 건가.
            

더 친절하게 말해야지, 더 숙여야지, 더 네네 거려야지. 그게 그렇게 좋으면 너나 그렇게 해. 

권력에 취해 헤롱 거리는 사람들은 배가 불룩할 정도로 밥을 실컷 먹고도, 간식을 먹겠다고 투정하는 아이와 같다. 더 먹으면 배탈이 날지도 모르는데, 그건 모르겠고 무조건 더 먹겠다고 우는 아기 말이다. 
           
인간들만 모였다 하면 권력이란 생물체는 자연스럽게 태어난다. 공평하다는 친구관계에서도 은근히 갑, 을로 매겨지는 사이가 존재한다. 하물며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일을 하는 사회에서 권력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 아니겠는가. 


문제는 자연현상 같은 권력이 아니다. 문제는 권력의 소유주다. 어떤 사람이 권력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그 권력은 모두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다. 

A는 회식차 간 노래방에서 직장 동료 C에게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 농담을 듣던 다른 동료 B가 기분이 상했는지 A를 구박했다. 


- 1절만 해. 


B는 A보다 6살이 어리고, 서로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다. 나이차도 있고 친하지도 않은 타인에게 반말로 신경질을 내는 건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 B한테 한 농담도 아닌데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A는 당황한다. 


A는 살짝 망신당하는 기분이었다. 농담이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 항상 남의 마음에 쏙 드는 농담만 할 수도 없는 거니까. A는 B의 행동을 용납했다. 

그다음 날, 휴게실에서 A와 B를 비롯해 동료들이 간식을 먹고 있다. 


B는 지난 회식 때 A의 대처를 기억해냈다. B는 시끄러운 노래방에서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며 A를 구박했다. A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B는 A의 허용적인 태도가 만족스러웠다.


A가 불쾌했을 텐데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B는 안하무인의 행동을 제지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강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첫 직장이라 겁먹은 면도 있었는데, A의 태도 덕분에 B는 살짝 자신감을 얻었다. 자신이 험난한 사회생활에서 똑 부러지게 대처한 듯한 느낌에 은근히 자부심까지 생겼다.  

이런 감정이 뒤섞여 B는 A에게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남한테는 1절만 하라면서 본인은 2절까지 한다. 


- 왜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A가 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B가 신경질을 냈던 장면은 정확히 기억난다. B는 A를 공격하고 싶지만 A한테 공격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A의 얼굴 대신 다른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A가 고개를 돌려서 B를 지목해 지금 네가 한 말이 나한테 한 말이냐고 묻는 건 더 민망한 일이다. B도 그런 심정을 예상해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오버한 게 아니었을까.  


A는 B와 어떤 감정교류도 하지 않았다. B가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이다. 오히려 A는 B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그런데도 B가 A에게 왜 그랬을까.

또 다른 회식자리다. 이 팀의 부장 D가 직원들이 앉은자리에 착석했다. D는 다른 직원들과 교류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이도 있고 경력도 많은 부장이지만 말도 안 해본 사람들과 대화하려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D는 어색함을 달래려고 갑자기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는 D 옆에 하필 B가 앉아 있었다. B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졸지에 담배연기를 꾸역꾸역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회식을 마치고 길가에 사람들끼리 모여 있었다. D가 없는 자리에서 B는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떡하냐고 신경질을 내며 그를 비난했다.

B는 A의 농담에 정색했다. A에게 피해를 입지 않아도 B는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D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받아도 B는 가만히 있었다. 눈치를 봐 가며 D가 없는 자리에서 구시렁댈 뿐이었다. 


B가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아닌데 왜 똑같이 불쾌한 상황에서 반응이 달랐을까. 


A는 권력자가 아니었고, D는 권력자였다. 권력의 유무가 B의 판단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거침없이 면박을 주던 B도 결국 사람을 봐가면서 행동을 조절했던 것이다.

권력을 가진 이에게 사람들은 겉으로는 느슨한 검열을 한다. 


요즘 시대에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걸 자연스럽게 허용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는 D의 행동에 직원들은 불만이 있을지언정 담배를 끄라고 말하지 못했다. A에게 소리 질렀던 B도. 


권력이 없는 이에게 사람들은 안팎으로 더 촘촘한 검열의 잣대를 들이댄다. A에게 소리 질렀던 B처럼. 

왜 그런 농담을 해? 왜 그런 옷을 입어? 왜 그런 가방을 매? 왜 말을 안 해? 왜 말이 그렇게 많아? 


왜 퇴근할 때 인사를 안 해? 왜 업무 메시지에 회의 시간에 참석이 어려우면 전화 부탁드린다는 걸 안 적어? 왜 에어컨 끄는 법을 몰라? 


왜 웃어, 내가 우스워? 왜 무표정해, 나 때문에 기분 나빠? 왜 한숨 쉬어? 왜 대답이 없어? 왜 말이 느려? 왜 말이 빨라? 왜 전화를 바로 안 받아? 왜? 왜? 왜 그래, 왜?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저런 지엽적이고 꼬장꼬장한 그물망을 씌우지 않는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일일이 태클을 거는 일들은 권력의 바깥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 권력이 없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친절하게 대해도 상대의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하면 당장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 될 때가 많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사리에 안 맞는 말을 하거나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과도하게 반응해도 괜찮은 사람이 될 때가 많다. 사람들이 뭐라고 잘 안 하니까. 

이 점 때문에 일단 권력자는 마음은 편할지 모른다. 화를 내는 본인 앞에서 찡그리기만 할 뿐 다투지 못하는 직원을 보며 유치한 승리감에 도취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다수의 침묵은 그에게 독이 된다. 


권력자는‘똑똑하고 배려 있는 멋진 사람’이라고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쉬운 환경에 갇힌다. 


사람들이 별 말을 안 한다는 게 곧 긍정의 표시는 아니다. 말하기 힘들고, 말해도 상대는 안 듣고, 자신이 누구한테 뭐라고 말할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상황을 유야무야 넘기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권력자의 인성, 언행, 사고력, 판단력, 인지력 등을 진심으로 피드백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설령 피드백을 듣는다 해도, 권력자는 이런저런 안 좋은 평가를 수용할 만큼의 배포가 준비되어 있는가?

E 회사의 F 사장은 오전에 입사자에게 입사 메일을 보내고 한참을 기다렸다. 요즘 시대에 입사 소식을 알리려면 입사자에게 핸드폰으로 전화하거나 문자를 보내면 된다. 빠르면 10초 이내로 끝나는 업무다. 


그런데 F는 달랑 메일만 발송하고, 무작정 답이 오길 기다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2시간을 기다리다가 입사자에게 왜 메일을 봤는데 연락이 없냐고 문자를 보냈다.


게다가 F는 메일에 갖가지 회사의 규칙을 편지 형식의 줄글로 적어 보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까다로운 규정이 담긴 공적 메일을 마치 친구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처럼 보낸 것이다.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아마 아무도 피드백을 주지 않아서 그런 종류의 메일로 보낸 것으로 추정한다.  

F는 회사에 들어온 신입사원을 괴롭히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차분하고 성숙한 태도로 회사 일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아 분풀이를 해 사람을 떠나가게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예를 들면, 어떤 직원이 회의를 알리는 업무 메시지에 ‘회의시간에 참석이 불가하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안 썼다고 다짜고짜 전화까지 해서 성을 내는 것이었다. 


원래 시간이 안 되면 연락을 주는 건 상식적인 대처다. 진작부터 본인의 시간이 안 되면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걸로 회의 시간을 조율해 왔다. 암묵적으로 다 아는 업무 내용을 다시 적어야 하는가. 

게다가 별로 중요한 요소도 아니다. 그 말을 안 써도 회의시간이 본인의 시간에 맞지 않으면 연락을 준다. 그 말을 쓰냐 안 쓰느냐가 전혀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데, 사장이 전화까지 해서 길길이 날뛸 사안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F는 오후 2시에 회의를 하자고 말해놓고, 갑자기 별 다른 말도 없이 오후 1시에 회의를 시작해버렸다. 직원이 힘들게 조사한 아이템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취소하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었다. 


F는 뭔가 잘못됐다고 말하면서도 잘못됐다고 생각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건 설명 못하겠어요.'라고 발뺌하곤 했다. 그는 사장의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못했다.  

F는 단순하게 처리할 일을 복잡하게 처리하고, 영양가도 없고 지엽적인 일에 집착해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작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허술하게 대처했다. 


F는 일의 우선수위가 중구난방이었다. 그런데 그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직원이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F를 쓸데없이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이미지로 생각해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F는 끊임없이 직원들에게 본인의 위치를 자꾸 설명했다. ‘나는 평가하는 사람이고, 기준이 높은 사람이다. 그래서 난 대단하다.’라는 F만의 논조였다.

하지만 F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몸담은 업무의 특성상 외국어를 잘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F는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아 필요한 때마다 매번 특정 플랫폼의 번역기를 썼다. 


그래서 그가 일을 할 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업무의 질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서도 직원이 특정 플랫폼의 번역기 이름을 몰랐다는 사소한 이유로 F는 그를 비웃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각성하기 힘들어 보였다. F는 직원들과 교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진심 어린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 F는 회사에서 평범한 대화조차 하지 못하고, 혼자 일하다 혼자 퇴근했다. 


소통의 부재로 F는 더욱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서서히 퇴화하고 있었다. 

인간은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내 삶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으면 나쁜 길로 빠질 때가 있다. 내가 최고라는 생각은 허망한 착각이며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허위 주장일 뿐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있다.  패션 디자이너는 ‘이 천은 똑똑한 사람들만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허공에 마임을 한다. 디자이너의 거짓말에 속은 임금은 막판에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한다. 


요즘 같으면 공연음란죄로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벌거벗고도 당당한 임금을 본 사람들은 깔깔깔 웃는다. 그런데도 임금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건지 정말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행진을 멈추지 못한다. 

권력을 오용하는 권력자의 최후는 존재 자체가 우스워지는 것이다. 동시에 우스운 존재가 된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보는 시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모든 상황이 뿌옇게 보인다. 


그는 초점이 안 맞아서 사물을 분별하지 못한다. 자주 헛다리를 짚고, 동서남북으로 휘청인다. 권력자가 실수해도 사람들은 방관한다. 


권력자가 헛다리를 짚든 말든 어차피 저 사람은 독불장군이니까 직언을 안 들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그 예상은 슬프게도 자주 들어맞는다. 

비판과 담을 쌓은 사람은 오답노트를 만들지 않고, 밑줄도 안 치면서 교과서만 읽는 학생과 같다.


만사에 우선순위가 엉망이다.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우선수위는 본인의 기분이다. 기분대로 사는 건 어린아이뿐이다. 어린아이는 장소가 어디든 누구와 있든지 떼를 써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엄마만 난처한데, 아이는 그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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