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잘못을 덮고자 선택하는 상술

나르시시스트는 남을 지적하길 즐기면서 남한테 지적을 당하면 난리를 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아성찰을 하지 못한다.

내면 깊숙한 묻어 둔 수치심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은 비판에도 날선 반응을 보인다.

초라한 자아를 들킨 것만 같아 너무 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진실과 마주 보는 게 수치스러워한다.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문득 이런 고백을 했다.

난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는 정말 높은데, 자존감은 바닥이야.


평소 그는 혼자 다녔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었다.

복도에서 마두치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거래처와의 통화에서 형님거리면서 나름대로 비위를 맞추는 모습.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모습은 좀 달랐다.

그는 무척 오만했다.


무엇보다 그는 강약약강의 표본이었다.

일단 그는 윗사람에게 지나치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상 앞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꼬리를 내리고, 어리숙한 척을 했다.

남이 힘들게 들고 온 커피를 막판에 뺏어가서 본인이 들고 온 것마냥 갖다 바치곤 했다.


하지만 갓 들어온 인턴에게 그는 안면부터 바꿨다.

고압적이고 무례했다.


넌 이걸 아니?
내 말이 맞는데, 나랑 내기할래?


무척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경력이 일천해 보이는 대상에게만 작정을 하고 과하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이미 그의 소문은 자자했고,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짜증을 내고 훈계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좋아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인턴이 타 회사에서 꽤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게 됐다.

그런 좋은 소식을 듣게 된 후 그는 놀랍게도 태도를 바꿨다.

약간의 탄성까지 내지르면서 곧바로 기가 죽었던 것이다.

젊은 인턴이 합격한 회사는 대기업이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였다.


나르시시스트는 인턴을 아랫사람으로 인식했지 타 회사의 경쟁자 혹은 동급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이 가진 조건은 늘 가변적이다.

그는 조건만 따라 태도를 휙휙 바꿔가며 사람을 막 대했다.

그런데 하대하던 상대가 조건이 좋아지니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의 사고구조로는 이제 인턴을 구박하지 말고, 우호적이고 예의바르게 대해야 한다.

그런데 한 떨기 자존심이 걸림돌이 됐다.

그는 인턴에게 질투도 느끼고, 부러움도 느꼈다.

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인턴이었다.

본인이 그토록 공격적으로 대하던 '동생'이었다.

그 대상이 조건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게 스스로도 용납이 안 됐던 것이다.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다.

마음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짜증, 질투, 분노, 경멸, 미움, 증오 등 부정적인 감정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는 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기반성이 아주 힘들다.

그는 명백히 잘못한 일에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버틴다.

온갖 궤변과 말도 안 되는 남 탓을 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그가 잘못을 인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엉겁결에 한 번 정도 사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수박 겉 핥기 식의 처세술에 불과하다.

거기에 진심은 없을 거다.

다만 상대가 직접적으로 사과를 요구하니 상황을 수습하거나 피하려고 사과하는 흉내를 냈을 가능성이 높다.


평소 나르시시스트는 공격자 역할을 자처한다.

희생양에게만 유독 과도하게 신경질을 부리거나 꼬장꼬장하게 지적질을 해댄다.

이것은 나르시시스트의 처세술이다. 타인을 공격해 자신이 운신할 곳을 확보하는 거다.

그러다 보니 화를 내는 사람들도 대개 희생양들이다.


자, 나르시시스트가 희생양에게 비판을 받고, 지적을 듣는 일은 무엇이다?

그의 유리 같은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지는 사건이다.

잊으려고 발버둥 쳐도 마음이 깊게 패이는 상처다.


그제야 나르시시스트가 믿었던 희생양의 온순한 이미지가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서열을 한 방에 무너뜨린 희생양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두려움을 감추려고 화를 표출한다.

선인을 연기하거나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

그러니 이렇게 어리석은 나르시시스트는 사과를 하기는커녕 자기 보호만 하느라 궤변을 늘어놓기 바쁘다.


A는 B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지인이다. 나이차는 꽤 많이 났지만 여러 차례 막말을 들었다.


정말 짜증 나게 하네.

너는 이해력이…(비하하는 뉘앙스로 말하면서 뒷말을 흐림)

그 선배한테 알아서 기어(명령조로 단언하듯이)

초등학생 같다


언젠가부터 그는 무례해졌다.

사소한 일에도 호전적인 태도로 나왔다.

곤충이 허물을 벗듯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처음에 A는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참고 참다가 전화를 걸었다.

마음에 걸리는 있다면서 전후상황을 설명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B는 펄쩍 뛰었다.


난 바가지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아.

너 때문에 화가 난 적이 없었어.

짜증 난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

네가 망상한 것 아니야?


웃기지만 상대가 혼란스러워서 망상을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기까지 했다.


A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B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 상처받으니까 얘기하지 않는 게 어때?”


저 말의 서브 텍스트를 읽어보자.


일단 A의 비판에 B는 상처를 받았다.


‘서로’ 상처받으니까 대화하지 말자는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A는 사과를 받고 싶다.

그러려면 대화를 해야 한다.

그의 언행을 주제로 말을 꺼내야 관련 사과를 받든 말든지 할 것 아닌가.

대화하면 A는 결코 손해보지 않는다.

그리고 내 감정과 생각을 말로 표현해야만 상대도 알 수 있다.

해명도 듣고 사과도 받으려고 일부러 말을 걸었다.

얘기해서 결국 합당한 사과를 받으면 가장 좋은 결과를 얻는 거다.

이런 것들은 다 대화로 가능하다.


저 말은 B의 자기 방어적인 표현이다.

저 말에는 서로’가 아닌 ‘B’의 이름만 들어가야 마땅하다.


평소 B는 본인은 고칠 점만 보는 사람이라고 홍보를 하고 다녔다.

고칠 점을 본다고 일부러 말한다는 게 우스워보일 여지도 있다.

A도 B의 행동이 어색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정작 비판을 받는 입장이 되니 B는 다짜고짜 도망을 칠 준비를 했다.


물론 본인이 잘못한 걸 길게 말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그는 A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가감 없이 비난해 왔다.

비판자의 입장일 때 결코 상처를 운운하지 말을 아끼지 않았다.


B는 대화를 거부할 뚜렷한 명분이 없다.

그래서 A를 생각해 주는 척하며 뒤로 물러섰다.

본인이 상처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밀한 속내를 말하지 않고 상대를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다짜고짜 묶었다.


평소 B는 부정적인 성격을 핑계 삼아서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다녔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니 상처를 운운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면을 직면하고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행위 자체에 깊은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B처럼 속이 빤히 보이는 명분을 만들어 대화에서 도주하는 것이다.


진심 어린 반성과 철저한 회개란 그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아성찰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 의문이 올라와도 남 탓을 하며 덮어버린다

나르시시스트는 놀라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는 모든 상황이 본인 위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린다.

다른 사람을 무조건 비난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한없이 칭찬을 퍼붓는다.

괜찮은 사람으로 칭송받고 싶어 한다.

B는 누군가가 지적하는 걸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남들에게 하염없이 부정적이면서 말이다.

그는 지적을 받으면 일일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 도망가는 걸 택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맹목적으로 본인이 옳다는 전제를 물어 늘어진다.

그는 타인을 이해할 의지도 없고, 여력도 없다.

본인의 생각과 배치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도 못한다.

반대의견을 듣는 것 자체가 그에게 모욕적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객관적인 실측이 안 되는 성격인 것이다.

그리고 타인을 배려한다는 게 뭔지 진심으로 위한다는 게 뭔지를 잘 모른다.

그런데 이타성이 없다는 걸 스스로는 모른다.


자기 중심성이 강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한다는 발상을 잘 못한다.

틀 안에 있을 때는 틀 밖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것과 같다.

틀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틀 밖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틀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데 어떻게 밖이 있다는 걸 감안하겠는가. 나르시시스트의 사고력이 그와 비슷하다.

나로만 가득 찬 세상에 사니 이타적인 게 뭔지 모른다.

따라서 이기적인 게 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억울한 거다.

난 사람을 선의로만 대하는데 남들이 오해받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니까 말이다.


그의 주관적 관점에서 본인의 생각과 행동은 다 옳다.

틀려도 맞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와는 논리적인 대화가 안 된다.

모든 게 다 남 탓이다.

타인의 입장과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낮다.

비판에 직면하면 남들보다 더 크게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건강한 비판력을 행사하는 상대를 총공격한다.

온갖 억측과 모함을 하면서.

이때 그의 전투력은 생존을 위한 발악에 가깝다.


나르시시스트는 비판하는 걸 좋아한다.

엄밀한 말하면, 그건 비판이 아닌 비난이지만.

재밌는 건, 그의 입장이 뒤바뀌었을 때다.

타인에게 날 선 비판을 받았을 때 그의 태도다.


나르시시스트는 불법을 저지르다 언더커버 형사에게 걸린 사람처럼 군다.

얼굴은 사색이 되고, 증거를 숨기려는 것처럼 행동은 다급해진다.

혼비백산한 채 일단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그의 주장은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다.

궤변은 많다.

앞뒤 말이 다르다.

나르시시스트가 이성적 판단을 할 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어서다.


내로남불의 의인화가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이때 그의 전투력은 생존을 위한 발악에 가깝다.

나르시시스트는 남과 똑같은 잘못을 해도, 자기 자신은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해명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누군가의 비판에 이렇게 대항한다.


"너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너는 나를 B라고 지적했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너도 B인 것 아니니?"


"너도 마찬가지잖아."


사실 이 정도의 말은 누구라도 방어적인 면에서 쓸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적으로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


그렇기에 저 말은 상황에 따라서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일 때도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가 저 말을 쓰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이다.

누구나 다 생각과 정서의 결이 다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의 그것은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건강한 정서 체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


평소에도 그들은 자신의 단점을 남의 단점으로 상쇄시켜 버린다.

다시 말해,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을 지적하는 내용을 잘 들어보면, 사실 지적을 하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일 때가 많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스트가 남을 지적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단점을 고백해 버리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가 상대를 향해 자신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상황만 놓고 보면, 자기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비판의 화살을 최대한 반사하려고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을 비판하는 상대를 향해 "너도 마찬가지잖아."라고 말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자신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가 자신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마찬가지라고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상대를 향해 "마찬가지"를 운운하는 진짜 이유는 상대 입을 막기 위한 잔기술이다.


물론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자신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꾸며댈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가 들이미는 그 이유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궤변에 불과하다.

나르시시스트의 말은 엉킨 줄과 같다, 이리저리 엉켜서 어디가 줄의 시작이고 어디가 줄의 끝인지 모르는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 상대에게 비판받고 있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은 원래 없던 일이라고 주장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상황에서 억측을 한다.


"네가 기억의 혼재가 있는 거 아니야?"

일단 나르시시스트는 지적을 받으면, 남 탓을 하거나 모른 척하기 바쁘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오리발을 내밀어 본다

이 주장에 대한 반박은 이렇다.


기억의 혼재란 두 가지 이상의 기억이 존재한다는 전제일 때 성립이 가능하다.


하나의 기억은 기억의 혼재가 될 수 없다.


혼재는 말 그대로 두 가지 이상이 뒤섞이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스트가 기억의 혼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뒤섞인 기억의 실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억과 어떤 기억을 지칭하는 건지 나르시시스트가 스스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말하는 두 가지 이상의 기억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가 걱정하는 척하면서 상대가 혼란해하는 것 같다고 하지만, 사실 나르시시스트야말로 아무 증거도 없는 막무가내식 주장을 하고 있다.


나르시시스트가 "기억의 혼재"를 운운하는 이유는, 상대가 겨눈 총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섣불리 아무 말이나 던져본 것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상대에게 아무 공이나 던져 본다

그들은 그런 허술한 주장을 하면서, 상대가 주춤하기를 기대한다.

만약 "기억의 혼재"라는 말을 듣고 정말 상대가 주춤거리면, 나르시시스트는 그때부터 기세 등등 해질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은 정확한 기억을 말한 상대를 괜히 엄한 사람한테 와서 따지는 캐릭터로 몰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 상대는 나르시시스트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강력하게 차단해야 한다.

상대가 멈칫하면 나르시시스트는 적반하장으로 남 탓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사전에 최대한 차단해야 한다

사실 이 지점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를 엄한 사람한테 따지는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대를 두려워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그 두려움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상대를 아무렇게나 모함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바로 비판받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평소에 오만한 자세로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비판당하는 입장일 때면 눈에 띄게 긴장한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고장 날 때가 지적받을 때다

나르시시스트의 정체성은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판을 해서 자존감을 높이고, 비판을 받아서 자존감이 낮아진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사활을 걸고 비판하기 위해 노력하고, 비판당하지 않기 위해 버둥거린다.


나르시시스트가 비판을 반박하고자 이말 저말 던져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나르시시스트가 만들어낸 최후의 보루는 이렇다.


"너는 완벽하니?"

나르시시스트가 근엄한 표정으로 "너는 완벽하니?"라는 방어막을 치는 것도 일종의 도피 상술이다

당연히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상대는 나르시시스트가 완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점을 잘 알면서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갑자기 초점을 절대적인 완벽에 갖다 댄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평소에 나르시시스트가 보이는 태도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수시로 남을 비판한다.


그들은 비판을 위해 대화한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런데 그토록 비판만 해대는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나는 완벽한가?"라는 질문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비판할 때는 자기 검열도 하지 않으면서, 남이 비판을 하면 자기 검열을 유도한다.


그게 나르시시스트의 수법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자기비판을 한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게 없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나르시시스트가 하는 비판은 비난에 가깝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를 위하는 척하면서,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상대를 깎아내리고 비웃는다.


나르시시스트가 비판하는 궁극적인 동기는 바로 자신의 위신을 위해서다.


그들은 비판을 하면 자신의 위상이 올라갈 거라는 이상한 맹신을 한다.


반대로 그들은 비판을 받으면 자신의 위상이 크게 추락할 거라는 해괴한 맹신을 한다.


그런 이상한 맹신이 나르시시스트를 미치게 만든다.

나르시시스트는 요청하지 않은 충고를 해대면서 남을 이끌려고 하지만, 사실 가장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나르시시스트다

결론적으로, 나르시시스트는 극한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판을 받은 나르시시스트는 오히려 남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며 도망칠 것이다.


그게 나르시시스트만의 생존 방식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모순에 질려 버린 상대는 결국 그를 떠난다.


그렇게 나르시시스트는 버림받는다.

결국 나르시시스트의 최후는 혼자가 되는 것이다. 남들이 같은 이유로 자신을 떠나도,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떠나 간 상대를 보면서 깨달음이 있을까?


아니다, 당연히.


만약 그랬다면, 이 글을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떠난 뒤 빈자리를 보면서 모기만 한 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르시시스트 왈

"내 말이 전달이 잘 안 된 것 같아."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닌데 네가 기분 나빠할지 몰랐어."


그의 말이 너무 잘 전달돼서 그 말을 들은 상대는 화가 나 떠났다.


그리고 정말 상대가 기분 나쁠지 몰랐을까? 나르시시스트는?


끝까지 나르시시스트는 현실을 직면하지 못한다.


이후에도 나르시시스트는 모순덩어리인 생존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그 굴레를 반복하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스트만의 생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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