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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는 자존감을 뺏기 위한 시소놀이다

스스로 자존감을 채우지 못해, 남의 자존감으로 연명하는 나르시시스트

"도둑이 돈을 훔쳤어요."


피해자가 주장한다. 

그리고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려고 CCTV를 법정에 제출한다. 

물리적 증거로 인해 도둑은 확실하게 도둑으로 인정(?) 받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의 자존감을 야금야금 훔쳐가는 좀도둑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찍힌 CCTV는 없다. 

목격자도 없다. 

가해자도 없다. 

오로지 피해자만 있다. 

나르시시스트를 찍는 CCTV가 있다면

처음에는 나르시시스트도 친절하다.  

희생양을 만들려고 따뜻한 태도로 관계의 포문을 여는 것이다.  


당분간은 그와 잘 지내게 될 것이다. 

아직 숨을 고르는 단계이니 말이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다. 

상대가 진정성 있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나르시시스트는 예열을 마친다. 

작은 일을 빌미삼아 짜증을 내면서 구박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다.   

지적을 하려고 명분을 만드는 과정이다. 

서열 관계를 공고히 하고, 관계를 독점해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단계다. 


희생양은 나르시시스트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다. 

그래서 현실감각을 발휘한다. 

그의 말과 행동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잘못을 논리 정연하게 지적한다. 

누가 들어도 잘못했다고 인정할 만한 것만 말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비판을 받았을 때 나르시시스트는 뻔뻔하게 나온다. 


“네가 나를 따뜻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나 본데 사실 난 시니컬한 사람이야. 냉랭한 편이거든. 오해했던 것 같아.” 


 이 주장의 맹점은 무엇일까?

나르시시스트는 시니컬이나 냉랭함이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한다. 이런 주장은 방어기제다. 잘못을 인정하는 게 싫어서 성격이나 성향으로 단순하게 치부하는 것이다

희생양은 오해하지 않았다. 

실제로 초반에 나르시시스트는 예의를 갖췄다. 

그리고 변한 것도 맞다.

나르시시스트의 행동을 정확하게 기억해 뒀다가 어느 시점에서 의아함을 느껴 비교해 봤을 뿐이다. 


맹점은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문제를 다 남 탓으로 돌린다는 거다. 

그는 의도적으로 행동을 조절해서 환심을 얻었다. 

그리고 근거리에 들어온 상대방에게 의도적으로 발길질했다.  

나르시시스트는 동기의 불순함을 인정하지 못한다.

대신 희생양의 멀쩡한 판단력을 비난하며 착각했다고 주장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시니컬이나 냉랭함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는 것은 방어기제를 작동한 것이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최대한 회피하거나 잡아뗀다. 

그런 일환으로 옳고 그름의 영역에서 살짝 비켜난 발언을 한다. 

성격이나 성향 탓이라고 책임을 돌리는 거다. 


희생양의 비판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동안 공들여 만든 서열관계가 무너진다는 걸 의미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한다.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기에 잘못을 인정하면 체면이 구겨진다고 인지한다. 

그래서 말을 돌리거나 궤변을 늘어놓으며 행동에 책임지는 것을 최대한 기피한다. 


"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너 혼자 왜 그래?"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상대가 혼자 그렇게 생각했나? 나르시시스트여, 다시 말해보라

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는 온통 지적과 비난으로 도배가 된다. 


이런 일을 처음 겪으면 기분이 무척 나쁘면서도 생소하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처해하다가 상황을 유야무야 넘겨버리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나르시시스트는 당황하는 희생양을 비웃으며 잽을 더 날린다. 


나르시시스트가 비난한답시고 과잉행동을 할 때 즉각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낫다. 

희생양이 영향을 받는다고 느끼면 그는 즐거워한다.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망상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말에 부정적인 심리를 비춘다면 결과적으로 먹잇감을 던져주는 꼴이 된다. 


그리고 갑자기 변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매너를 갖췄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을 부정하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오늘만 불쾌하게 군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아니면 나랑 친해서 가감 없이 솔직해졌다고 긍정회로를 돌리기도 한다. 

무례함을 모른척하거나 일관성 있는 태도로 달래 삐진 마음을 돌리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런 행동 또한 나르시시스트가 더 제멋대로 굴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게 된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된다. 

그리고 더 심해진다. 

어느새 희생양 하대하기는 그의 디폴트가 된다. 


계속 과거의 매너 있는 모습을 믿고 있다면 점차 자학에 빠지게 된다.

내가 정말 잘못했나.

내가 정말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인가. 

원래 나르시시스트는 온화한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건가. 

괜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심지어 나중에는 허접한 인성의 소유자인 나르시시스트가 괜찮은 사람 같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때 나르시시스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검열해서 쳐내는 게 중요하다. 

지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수용하면 나르시시스트의 트집잡기에 힘을 실어주는 게 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상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 다 선의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나르시시스트가 희생양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괴롭힘이다. 

이것은 직장 내 괴롭힘 행태와 결을 같이 한다. 

무엇보다 그의 지적은 사실이 아닐 때가 수두룩하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과 대화하면서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해 왔다. 

그래서 대부분은 상대의 언행을 타깃삼아 비난한다. 

다만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는다.   

결국 거짓말도 사실에 거짓을 첨가하거나 일부 사실을 누락하는 거다. 

희생양의 한 마디에 나르시시스트적 뻥튀기 화법을 섞는 것이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반박하기 애매한 경우가 있다.  


진실은 이렇다.

나르시시스트는 객관적인 기준도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비난한다.   

녹슬어서 무게를 재지 못하는 저울처럼, 나르시시스트의 판단력이 그러하다

쾌활한 성격의 희생양이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불평한다.

 

"너는 친한 사람들하고만 잘 지내는구나. 그런데 다른 사람들하고 친해질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친구들이 많기는 한데 깊은 인간관계는 아닌 것 같아."


어떤 때는 사람들과 친하게 못 지내고 방황하기도 한다. 

어떤 공동체에 가든지 입장이 다르고 만나는 사람이 다른데 매번 잘 지내기란 쉽지 않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빈정거리며 불만을 토로한다.

 

“네가 친구들하고 잘 지냈을 때 소외감 느낀 사람도 있을 걸?”


희생양이 방학을 맞이해 집에서 쉬면서 충전 중이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짜증을 낸다.

 

“너는 왜 아르바이트도 안 하니? 시간 있을 때 용돈 벌이는 해야 하잖아.”


희생양이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정색을 한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학생일 때가 좋은 거야. 직장생활 시작하면 방학도 없다?”

오른쪽과 왼쪽 길 사이에서 오로지 한 길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하자.



상대가 오른쪽으로 간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상대가 왼쪽으로 간다. 

나르시시스트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잔소리를 들은 상대가 오른쪽과 왼쪽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태도를 또 비난한다.

 

“한 길을 못 고르고 우왕좌왕하는구나.”


나르시시스트의 잔소리를 들은 상대가 고심 끝에 다시 오른쪽 길을 가기 시작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말한다.

 

“왼쪽으로 안 가고 왜 오른쪽으로 가니?”

오른쪽으로 가라는 건가, 왼쪽으로 가라는 건가? 위로 가라는 건가. 아래로 가라는 건가? 나르시시스트도 본인이 뭘 말하고 싶은지 사실 모른다

자, 이게 나르시시스트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건 불합리한 게임 규칙이다. 

아니 사실 규칙도 아니다. 

일관성이 없으니까. 

기준도 없으니까. 

나르시시스트의 말은 실체가 없다. 

내용이 없다는 거다.  

논리도 주관도 현실성도 없는 게 나르시시스트 판단력의 실체다.


상대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든 못 어울리든 중요하지 않다.

상대가 오른쪽 길로 가든 왼쪽 길로 가든 상관없다.


이미 나르시시스트는 팔을 걷어붙이고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채비를 마쳤다.  

상대가 무엇을 하든 어차피 그는 비난한다.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 틀에 갖다 붙일 뿐이다.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남들 앞에서 확신 넘치는 태도로 상대를 지적한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나르시시스트가 비난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뻔하다.

바로 자존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매우 낮은 자존감을 지니고 있다. 

그는 건강한 방법으로 공허한 내면을 채우지 못한다. 

그래서 자존감을 높이려고 일부러 남의 자존감을 뺏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식량을 마련하지 않고 이웃의 식량을 훔쳐오는 약탈자다.

선량한 자의 뒷주머니에서 몰래 지갑을 빼가는 소매치기다.

 

나르시시스트는 홀로 서지 못하고, 누군가를 의존해서 살아남으려고 한다

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는 마치 시소놀이와 같다.

오른쪽이 내려가면 왼쪽이 올라오고, 왼쪽이 내려가면 오른쪽이 올라온다.

나르시시스트와 놀면 한쪽은 자존감이 내려가고, 한쪽은 자존감이 올라간다. 


하루라도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나르시시스트.

그러나 상대가 일리 있는 지적을 하면 나르시시스트는 펄쩍 뛴다.

시소가 상대편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남에 의해 자존감이 왔다 갔다 거리는 그가 가장 상처받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럴 때 나르시시스트를 더욱더 세게 몰아 붙어야 한다.

그가 만들어 놓은 이상한 게임 규칙을 망가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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