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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괴롭힘 논란으로 고찰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심리전

어차피 내 화살은 안 보이는 투명 화살이니까, 누가 보든 상관없어

몇 년 전 어떤 걸그룹에서 집단 괴롭힘이 있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그가 가해자라고 지목한 대상은 귀엽고 청순한 이미지의 아이돌이었다.


사안은 일파만파 커졌다.


A 측은 팀에 있었을 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B 측은 괴롭힘은 없었다며 A의 일방적인 억측이자 오해라고 주장했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A와 B의 해석이 달랐다.


처음에는 A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B가 A를 괴롭히는 걸로 추정되는 영상들까지 올라왔다.

대중은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공분했다.  

"다른 그룹도 아니고 저런 그룹에서 그런 일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그런데 얼마 뒤 B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단지 A와 B가 성격이 너무 달라 어울리지 못했을 뿐이었다는 거다. 

오히려 B가 A를 많이 챙겨주려고 노력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졌다.


그리고 사실 B가 A의 태도로 힘들어했다는 말도 나왔다.

B도 나름대로 참아왔는데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서 슬프다고 했다.


B가 A를 괴롭혔다고 추정되는 영상을 반박하는 영상도 올라왔다.

기존 영상은 전후 맥락을 자르고, 일부분만 편집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A와 B가 서로 챙겨주고 농담도 하면서 친밀하게 지내는 장면도 있었다.

또 심각한 따돌림이라던 장면도 전체 맥락을 살피니 가벼운 장난에 불과해 보였다.    


어떤 이들은 섬세한 성정을 지닌 A가 친해지지 못한 상황을 혼자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B를 두둔했다.


진실은 무엇일까?

일단 무엇이 괴롭힘이며 무엇이 괴롭힘이 아닐까?

누구나 겪을 법한 갈등과 일방적 괴롭힘의 차이를 정확하게 가를 수 있나?

괴롭힘을 객관적인 수치로 기록하지 못하는데,  딱 떨어지는 괴롭힘 유무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이것은 괴롭힘이 맞고, 저것은 괴롭힘이 아닙니다. 판단을 마칩니다. 쾅쾅쾅.”

매사에 이렇게 딱 부러지는 결론이 가능할까?


괴롭힘은 물리적으로 증명 가능한가?


괴롭힘 정황 같던 영상, 당시 심정을 자필로 기록한 일기장, 목격자의 증언 등 물리적인 증거가 있다고 하자.  


이 증거를 토대로 괴롭힘이 맞다고 결론 내리면 논란의 여지가 없는가?

이 증거는 과연 증거로써 충분한가?

 

증거로써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증거가 얼마나 되어야 충분하다고 정의하는가?

충분하다는 것 자체가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함인가?

상대와 코드가 달라 멀게 지내는 것과 악의적으로 따돌리는 것의 차이를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나?


한 명이 한 명하고만 안 놀면 따돌림이 아닌가?

두 명이 한 명하고만 안 놀면 그때부터 따돌림이 되는 건가?


누가 봐도 문제가 있어서 지적하는 것과 괴롭히려고 비난하는 것을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구분할 수 있나?


“나는 지금 상대를 괴롭히는 중이야. 하하하.”

가해자는 이렇게 인지하며 남을 괴롭힐까?


괴롭힘 당하는 사람이 괴롭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괴롭힘이 아닌 게 되나?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도 생겼다.

법에는 괴롭힘을 규정하는 구체적인 기준이 나온다.

이런 현상을 보면 괴롭힘도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실체다.

그런데 법적으로 무혐의가 나와도 피해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맞다고 주장한다면?

피해자의 주장은 단지 착각에 불과한 걸까?

성격에 결함이 있어서 평범한 상황을 왜곡해 바라본 걸까?

아직 법이 미비해서 명백한 괴롬힙인데 괴롭힘이라고 인정을 못 받는 걸까?


괴롭힌 게 맞다는 판결이 나왔다고 치자.

그래도 가해자가 괴롭힌 적이 없다고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그는 양심이 없어서 끝까지 잡아떼는 걸까?

상대의 부족함을 바로잡으려는 순수한 의도를 모함받는 걸까?


중요한 건 가시적인 증거가 없는 괴롭힘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신적인 괴롭힘이 그러하다.

정신적 공격, 아마 다들 당해 봤을 거다

웃으면서 칼 꽂듯이 막말하는 십년지기 친구.

내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험담하는 이중인격자 직장동료.

후배를 열심히 칭찬하면서 과도한 업무를 주고, 나중에 그 공을 가로채가는 상사.


“당신은 나쁜 마음을 감추고 행동한 거죠?”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이렇게 따진다면?


“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깜짝 놀랐네. 양심에 찔리는군.”

가해자가 이렇게 대답하면서 잘못을 순순히 인정할까?

"아악, 미안하다. 정말. 내가 널 괴롭힌 걸 끝까지 숨기려고 했는데 딱 걸렸네? 맙소사." 이러지는 않을 거다

가해자가 불순한 의도가 있더라도 선의였다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멱살을 잡고 따져도 오해라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해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매사에 ‘나쁜 마음’이 있었는지를 선명하게 잡아낼 수 있을까?

오류가 많은 사람에게 가능한 일일까?  


이 걸그룹에서 괴롬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를 통해 인간관계의 대표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싶은 거다.


사람 간의 심리적인 상호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은 상대의 말과 행동을 토대로 의도를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인간관계의 모호함을 이용한다. 


D는 모 회사의 차장이다. 

그는 C가 쓴 기사를 고치면서 막무가내로 짜증을 냈다.

미친*이라고 쌍욕을 해댔다. 

책상을 쾅쾅 치면서 그에게 받은 자료를 바닥으로 다 떨어뜨렸다. 

아무리 책상을 쳐도 종이가 떨궈지기란 쉽지 않다. 

그는 주먹으로 자료를 슬슬 밀어냈던 것이다. 

나중에 주워서 갖다 버리라는 거다. 

고의성이 짙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C는 흩어진 자료들을 한동안 건드리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나고 여전히 자료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제야 D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C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실컷 노력(?)해서 C가 열심히 모은 자료를 쓰레기 버리듯 팽개쳤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본인 자리만 어지러워졌다. 

다른 팀원들의 자리는 다 깨끗했다. 

C의 자리도 깔끔했다. 

하지만 D의 자리에만 쓰레기가 가득했다. 

소소한 종이 무덤에 갇힌 그대여, 쯧쯧.   


아까와 달리 D는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C가 끝까지 치워주지 않을까 봐 초조해했다. 

허리를 굽히면 자료를 손에 쥘 수 있다. 

쓰레기통도 D의 자리에서 더 가까우니 팔만 좀 길게 뻗으면 갖다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여차하면 상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갈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갖다 버리라고 여러 차례 넌지시 말하기만 했다. 

본인이 저질러 놓은 상황이 수습이 안 되니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D의 자리니까 D가 치워야 한다. 

자료를 떨어뜨린 건 그다. 

장난감을 제자리에 갖다 두는 건 장난감을 흐트러뜨린 아이의 몫인 거다.  

이후 D는 두 번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다. 


몇 달간의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C가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어쩌면 D가 기다렸던 순간일 수도 있겠다.  

자리를 정리하던 C에게 D가 다가왔다.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날 미워했지? 널 위해서 한 그런 거야."


D는 C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자신이 못되게 굴어서 퇴사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D는 C를 괴롭혔다.

하지만 나쁜 사람 되는 건 싫어했다. 

내키는 대로 굴었다. 

그래도 좋은 이미지를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런 양가감정에 급발진해 전형적인 멘트를 날렸던 것이다.  


널 위해서 한 그런 거야.


거짓말이다.


물론 당시 C는 경력이 별로 없었다.  

아직 실력이 부족했다. 

지적받는 것은 당연했다. 

일단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아야 더 나은 내용의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누구나 겪는 과정이다. 

D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실력을 연마해 왔을 것이다. 


오랜 시간 경력을 쌓은 D는 C의 기사가 얼마나 부족한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엉성한 내용을 보니 답답했겠지.

화도 나고, 짜증도 났을 것이다. 

한편으론 무시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정신을 발휘했다.' 

이게 D가 막판에 제시했던 이미지다. 

책상을 치고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지른 게 이타적인 행위였다는 거다. 


그럼 C는 할 말이 없어진다.

D의 행동이 다 합리화가 된다.  

저 주장이 사실이라면 C는 그동안 느꼈던 모욕감을 부정해야 한다. 

D의 깊은(?) 속내를 몰랐던 게 돼버리니까 말이다. 

오히려 내 실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도맡은 D를 괜찮은 사람으로 봐줘야 한다. 

 

그런데 D의 말은 사실일까? 

오로지 C의 실력이 올라가는 걸 바랐기에 그랬을까? 

솔직하게 다 말한 게 맞을까?


아니다. 

   

D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오버액션을 감행했다. 


그는 감정을 격하게 표현했다.   

과잉행동이었다. 

이런 이면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D는 이 부서로 발령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상황상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 바닥에서 만만히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또 후배들을 관리해야 하기에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올라왔을 것이다. 

본인은 팀장이자 차장이기에 빈틈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개인을 일일이 상대하기보다 한 명을 타깃 삼아 본보기를 보이는 게 제일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팀원들 중에 지위가 가장 낮은 사람을 선택했다.

촘촘한 그물망에 잘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C를 향한 구박이었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을 향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C처럼 되지 않으려면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암묵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고 과도하게 흥분하는 모습이 팀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내 정치질이었고,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는 생존술이었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도 D처럼 행동한다.

그는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희생양을 괴롭힌다. 


그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지성적이고 선한 이미지를 추구한다. 

매너를 지킨다. 

배려하는 척한다. 

이타적인 척한다.  


그리고 자신을 빛나게 해 줄 도구 즉 희생양이 필요하다. 

온갖 구박과 학대를 당해도 끝없이 추앙해 줄 인물 말이다. 

그런 태도가 자신을 만족시킬 거라고 나르시시스트는 예상한다.   

이것이 그의 내밀한 속마음이다.  


괴롭힘은 비도덕적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스스로 괜찮은 존재라는 충족감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나쁜 행동에서 재미를 찾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죄를 지으면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도 듣고 싶다.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래서 택하는 방법이 ‘명분 쌓기’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이 모욕감을 느낄 만한 언행을 반복한다. 

상대를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단행할 만한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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