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동 우월순 기념관
방문객
이 길을 통해
광주의 난민들이 내게로 왔다.
옛날 광주 읍성에서 쫓겨난 한센인 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세워진
양림동으로 피신해 살았다.
난 그들을 반겨주었다.
처음 나의 방문객은 미국인 의사 윌슨(Robert M. Wilson: 우 월순) 이었다.
그는 내게 피신해온 한센인을 돌봐주고,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내 친구가 된 기독교 병원 건물도 세웠다.
결국 친구는 광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 되었다.
이후 윌슨은 전남 여수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또다시 애향원을 세워
버려진 사람들을 구제했다고 한다.
이후 난 대대로 기독교병원장들의
숙소가 돼 주었다.
윌슨이 떠난 후
수상한 방문객들이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윌슨이 있을 때, 영어를 배우기 위해
찾아왔었던 일본인들이다.
그들은 나를 통째로 차지해 버렸고,
시간이 흘러, 해방된 후에는 미 군정청 지사가
나를 이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북한군 사령관까지
내게 머물며, 기거하였다.
그 후로도 나는 이후 충 현 유아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아이들을 보듬어 주었으며,
지금 현재도 학생들의 배움의 장소가
되고 있다.
그렇게 난 늙어갔다.
녹슨채 방치되지 않은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앞의로도 나는
방문객을 맞이할 것이다.
마지막 쓰러질 때 까지 말이다.
비바람을 맞은 이들에게
난로가 되어주고
내려가지 못한 자들에게
계단이 되어주며,
흔들리는 자들에게 손잡이가
되어줄것이다.
내게는 아직
다락에 스며든 빛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