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을 적다 보면 정말로 고민이 팡팡팡 해결됩니다.
작년에 편집자 동료, 후배와 함께 재미 삼아 <고민의 발견>이라는 책을 기획했다. 나는 팡팡팡고민연구소 소장 '줄리'라는 필명을 쓰면서 2~30대 여성들이 고민할 법한 주제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십 대 중반의 후배를 공저로 끌어들여, 그녀와 친구들의 고민 사연도 모아봤다. 그리고 책 본문 일러스트를 위해 20대 초반 때 나와 후배가 좋아했던 만화가 '토마'를 수소문하기로 했다. 그녀는 만화를 꽤 오랫동안 접고, 영국에서 순수 미술 작업에 몰입하고 있었다. 다시 그녀와 연락이 되었을 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스무 살 언저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난 10년의 고민과 후회 목록을 책으로 엮다 보니 자연스레 토마쇼가 생각났고 절판된 <토마쇼 다이어리>의 그림을 써도 되겠냐고 토마 작가에게 물어봤다. 작가는 흔쾌히 허락해주었고 큰돈은 아니지만 영국에서의 삶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사용료도 송금했다. 회사에사 뭔가 재미난 일을 벌이자는 마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여 얼렁뚱땅 '다이어리 북'이라는 콘셉트로 2015년 여름에 <고민의 발견>책이 나왔다. 아니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몇몇 사람이 나를 '작가'라고 불렀다. 너무나 어색하여 차라리 줄리 소장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는데 그것 역시 조금 민망했다.
무겁고 가벼운 고민들을 껴안기도 하고 그 사이를 요리조리 통과하면서 깨달은 것은, 마음속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이다.아침에 마음의 소리와, 저녁의 마음의 소리가 다를 때도 있다. 어떤 것은 그냥 지나처도 되지만 그렇게 회피만 하다가는 '답정너'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고민들은 적어놨다가, 때가 왔을 때 마주해야 할 것들이기도 했다. 즉 고민이 생겼다는 것은 인생이 주는 신호였다. 그럴 때 연필 혹은 펜 끝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그대로, 들리는 대로 적다 보면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다.
마음의 소리,
나이스 캐치!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의 독백처럼, 내 마음에 솟아나는 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솟아나는 것들이 얼토당토하거나 어마무시할 수 있다. <고민의 발견>책에는 줄리와 유지가 솔직담백하게 마음의 소리에 대한 예시문을 써 놨는데, 독자들이 조금은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멘트는 우리가 이미 써놨으니 사용자들은 마음 끌리는 대로 적길 바랬다.
책이 나왔으니 출간 기념회도 해 보자 하여, 일들을 저질렀다. 일명 '낮술 상담소.'재미 삼아 시작했는데 출간 기념 북콘서트까지 한다고 하여, 내가 좋아하는 가수 도마를 초청하기도 했다. 솔직히 행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마음속으로 조마조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뭐든 일단 시작하면 되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녀 감성이 가득 담긴 책 한 권 만들어보고 싶었고 책 관련 모임을 하고 싶었는데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단 시작하는 것 그리고, 나 스스로 하기 힘들다면 누군가 함께하는 방법과 지혜를 얻기도 했다.
온라인 서점을 통해 '고민 댓글'을 달면 초대하는 방식으로 스무 명의 독자들을 초대했고, 다양한 연령대와 취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평일 낮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각자의 고민을 나누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안부 문자를 보내봐야겠다. A/S 상담소 모임도 해볼까 싶다.)
독자 몇 분이 나한테 해외에 나가 살고 싶진 않느냐, 계속 회사를 다닐 것이냐 등의 개인적인 질문도 해주었다. 그중 내 마음을 툭, 하고 치고 간 질문.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요?
"음,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것으로 먹고 살기는 어렵잖아요? 26살 때에 화실 다니기를 도전했었는데 회사에 야근이 많아 빠지는 일도 많았고, 또 스스로 너무 못 그린다고 생각하니 가기도 싫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그려서 언제 실력이 늘겠냐고 스스로 평가하면서 그만뒀었어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사실 잊고 있었는데요. 7년 전에 다녔던 화실 선생님께 오늘 당장 연락해볼 거예요. 질문해주셔서 고마워요."라고 대답했다.
* 북콘서트 인터뷰 기사 참고
http://ch.yes24.com/Article/View/28858
7년이란 시간. 마치 운명의 시계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는 순환의 시간이라고 들었다. 화실 쌤은 예전에 쓰던 018로 시작하는 휴대폰 번호를 그대로 쓰고 계셨고 홍대 앞에서 연남동으로 이사한 것 말고는 모든 게 그대로라고 하셨다.
"선생님, 저 그림 다시 그리고 싶어요."
"그래요, 오세요."
그렇게 다시 연필을 잡던 날. 너무 기뻐서 한동안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있었다. 다시 여기에 오려고 책을 냈던 것일까? <고민의 발견> 출간기념회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을까?
그렇게 화실을 다닌 지 일년이 되었다. 여전히 기초 단계지만 조급하지 않다. 이렇게 십 년을 그리면서 행복한 시간이 쌓이면 5~60대에 유명한 화가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설령 유명해지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내가 행복한 게 먼저다. 그게 내 마음의 소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