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난 뒤의 막걸리 한 모금의 맛
퇴사전
토익 점수가 필요해서 몇 년만에 문제집을 샀다. 10년 전에 비하면 문제들이 많이 어려워졌으며 하필 신토익으로 바뀌면서 문제 유형들이 많이 달라졌다. 평일에는 회사 다니는 것도 벅찬데 언제 공부를 해야 할지 마음이 갑갑하면서 뇌혈관이 좁아지는 기분이었다. 주말에는 TV 프로그램도 몰아서 봐야 하고 데이트도 해야 하는데 언제 하지? 그래도 평일에 한 시간씩 꾹 참고 공부하는 걸로 계획을 짜 봤다.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펼치니, 왜이리 그날 회사에서 짜증 났던 순간들이 떠오를까.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자신의 오류는 왜 인정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만 욕할까? 그 사람 때문에 기분 상해서 공부할 기분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집을 덮었다.
퇴사후
시간이 많은 나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공부를 미룰 수 없었다. 누굴 떠올리며 욕할 사람도 회사도 없었다. 매일 4시간씩 공부하면 한 달만에 원하는 점수 딸 것이라며 야심 찬 공부 계획을 짰다. 한 달 후, 시험 결과를 받았다. 성적이 예전 그대로였다. 1도 안 올랐다!!! 나름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그대로라니! 문제가 왜 이리 어렵냐고, 문제 당 몇 초씩 풀어야 하는 이 비상식적인 시험은 누가 만들었으며, 왜 젊은 사람들이 이 시험을 쳐야만 하냐고 허공에 대고 분노했다. 하지만 탓만 할 수 없었다. 내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었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는데 집에 가는 길에 막걸리 한 병을 샀다. 밥그릇에 콸콸 따라 한 모금. 너~~~ 무 맛있었다. 막걸리의 맛을 깨달은 뒤 시험공부 전략을 바꾸었다. 성실히 공부한 날은 스스로에게 막걸리 한 잔이라는 상을 주었다. 마치 아침에 밭일하고 점심 때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의 맛이 이렇겠지?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재시험을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패스했다. 막걸리에게 이 영광을 돌렸다. 신기하게도 시험이 끝나고 나니 막걸리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나에게 어려운 시련 또는 압박이 닥쳐오면 막걸리는 날 다시 찾아와주겠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