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집은 딸부잣집이다. 딸만 줄줄이 낳은 우리 엄마는 막내를 낳고는 사흘을 내리 울고 미역국도 드시지 않으셨단다. 돌림자 이름을 써서 딸만 내리 낳는다는 주위 사람들 말에 막내동생 이름은 돌림자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 더 이상의 동생은 생기지 않았고 그냥 우리 집은 딸부잣집으로 남고 말았다.
비록 딸밖에 없는 집이긴 했지만 우리 자매는 출가해서도 친정 가까이 살았고 덕분에 자주 얼굴을 보며 살았다. 그러나 정작 가족이 모두 모여 흥청거려야 할 명절날이면 두 분이 쓸쓸하게 보내셔야 했다. 맏이가 맏며느리 자리로 가서 그리된 것인지 어쩌다 보니 우리 자매들은 전부 남의 집 맏며느리였다. 명절날이면 하루 전날 시댁에 가서 장보고 음식하고 다음 날 저녁이나 돼야 친정에 들를 수 있는 그런 며느리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들이 되었다.
명절날 저녁이나 돼야 간신히 친정에 모일 수 있는데, 각자 시댁에서 오는 시간이 다르니 9시가 다 되어서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이 드신 부모님 두 분이 하루 종일 기다려 밤 늦게 사위들의 세배를 받았다. 우리 자매가 유독 시집살이를 심하게 당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으레껏 결혼하면 명절날 아침은 시댁에서 보내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을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된 엄마를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하면서는 더욱 마음불편하고 아들 없는 엄마가 가엽게 여겨지고는 했다. 내가 딸이라는 사실이 미안해지는 때가 명절이었다.
2.
차를 장만하고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여름날이었다. 친정에 들려 저녁까지 얻어먹고 아이를 태우고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물에 젖은 도로에 불빛이 비쳐 어려서 차선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운전도 서툰 데다가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는 터라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중 앞에 신호등이 노란불로 바뀌었다. 초보 시절이라 정직하게 신호를 지켜 멈추려고 속도를 줄이는데 뒷 범퍼에 쿵하고 무언가 닿는 소리가 났다. 앞으로 몸이 쏠린 아이는 놀라서 울음을 울어대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가 다쳤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웬 남자가 와서 창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나가니 차의 뒷 범퍼를 들이받은 푸른색 트럭 기사는 뒷목을 잡고 서서 대뜸 반말이다.
“그렇지, 여잘줄 알았어, 아니 노란불이면 달려가야지, 왜 서는 거야? 차 이거 어쩔 거야? 영업 뛰는 찬데, 목도 못 돌리겠네”
운전 경력도 짧고, 사고 경험도 없는 데다가 세상일에 아둔한 편인 나는 잘잘못을 따질 정신머리도 없었다. 물어 줘야 한다니 보험으로 해야 하나, 현금을 달라면 현금은 얼마를 줘야 하나 머릿속이 하얘졌다. 차 두 대가 길을 막아버리니 뒤에 오던 차의 운전자들까지 나와 차를 빼라고 소리를 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황해서 고스란히 물어줄 판인데 “뒤 차가 박았으니 뒤 차 책임이지 빨리 해결하고 차 빼요. 거 여자라고 얕잡아 보면 안되지” 누군가가 옆에서 끼어들어 역성을 들어주었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목소리도 들리고, 상황이 불리해진다 싶자 트럭 기사는 꼬리를 내리고 다친 데 없으니 각자 처리하자며 자리를 피했다. 옆에서 거들어준 사람이 없으면 고스란히 트럭 기사에게 당할 뻔한 바보 같은 경험이었다. 블랙박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쳇말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접촉사고 현장에서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던,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한두 해 전에는 내 차가 자기 앞으로 끼어들었다고 보복 운전을 해서 차량을 파손시키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경찰서에서 만난 가해 차량의 운전자는 ‘여자가 시건방지게 자기 앞에 끼어들어서 홧김에 그랬다’라며 진심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를 했다. 맨 처음 접촉사고 이후 20년도 더 지났지만 운전하는 남자들의 의식은 그닥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여전히 속도에 예민하며 여자 운전자를 얕잡아보는 경우가 많다.
가끔 주차장에 차를 댈 때 나타나서 훈수를 드는 남자들이 있다. 후진하는 차에 바짝 붙어서 손짓을 해가며 주차를 다 할 때까지 지켜보는 그런 남자들 말이다. 차에 부딪혀 다칠까봐 제발 비켰으면 좋겠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남자들은 대체로 여자가 운전하는 경우만 간섭을 한다. 내가 성격이 모나고 꼬인 사람인 건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지간히 오지랖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여자가 운전하니까 참견하고 싶은 게로구나’하는 마음에 언짢기만 하다.
3.
세상은 분명 예전에 비해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그 시절 우리 자매들처럼 시댁 식구들 앞에서 친정에 가겠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세상은 아니다. 블랙박스가 시시비비를 가려주니 차량 접촉사고가 났을 때 여자라고 억울하게 당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들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억울해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아직도 뉴스에서는 데이트 폭력, 몰래카메라 사건, 집단 내 성희롱 등 여자라서 당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페미니즘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하지만 내 딸에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차별이나 일방적인 희생이 나의 젊은 시절처럼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살아온 사람으로서, 딸아이의 엄마로서 내 자식이 살아가는 세상은 내가 살아온 세상보다는 한결 낫기를 소망한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존엄하고 귀한 존재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도 아니며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독립적인 인격체이다. 부디 앞으로의 세상은 남자와 여자가 대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부당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것이 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페미니즘을 화두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여자라고 얕잡아보지 말라고 거들어주는 것,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모이다 보면 우리는 분명히 앞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함께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