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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Aug 10. 2022

조금씩 참고 견뎌보기

이미지 : pixabay

젊은 시절, 서울 근교 소도시의 주공아파트에 산 적이 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워 한밤중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일주일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에어컨을 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라 너나없이 에어컨을 켜고 살았는데 어느 날 저녁에 느닷없이 전기가 나갔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냉장고가 멈춰 놀라서 베란다를 내다보니 주변이 캄캄한 것이 일대가 모두 불이 나간 듯 싶다. 아파트 밀집 지역의 대단지 아파트가 일제히 정전 사태를 맞아 온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버렸다.


더듬거리며 신발장 서랍에서 양초를 꺼내 불을 켜두고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가 나가니 인터폰조차 먹통이 돼 버려 관리 사무소에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더운 날 캄캄한 집 안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려니 도무지 답답해서 경비실에 내려가 물어보기로 했다. 


막상 밖으로 나오니 정전으로 엘리베이터마저 멈춰버렸다. 별수 없이 손전등을 들고 17층에서부터 걸어 내려갔다. 경비실 앞에는 우리처럼 더위와 답답함을 못 견디고 나온 이웃들이 이미 모여 서 있었다. 관리실에 다녀온 경비원에 의하면 열대야로 갑자기 늘어난 전력량을 견디지 못해 과부하된 변압기가 터져버렸다고 한다. 한전에서 복구하러 오기는 했는데 부품이 없어 바로 수리는 불가능하단다. 다음날 날이 밝아 부품을 구하고 변압기를 수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더운 날 불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하고 벌어진 상황에 짜증이 밀려오기도 했다. 덥다고 칭얼대는 아이를 데리고 자동차에 들어가 에어컨을 켜고 앉아 있었다. 몸의 열이 식자 아이는 금세 잠이 들어 버렸는데 잠든 아이를 들쳐 업고 17층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차 안에서 밤을 지새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30분 거리에 사는 동생 집에 가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결혼한 동생 집에 처형의 식구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게 제부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친정 부모님이 퇴직 후 고향으로 내려가셨으니 염치 불고하고 동생 집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변압기 복구가 언제 끝날지 몰라 동생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냉장고 정리였다. 냉동시켜두고 아껴 먹고 있던 식재료를 모두 버려야만 했다. 봉투가 터질 듯 담긴 음식 쓰레기를 몇 차례에 걸쳐 내다 버리며 그동안 얼마나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었는가 생각했다. 


평소에는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열두어 시간 동안 발생한 불편함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올여름의 폭염은 역대급이라고 한다. 게다가 장마가 길어지면서 무덥고 습한 날씨가 계속 되다보니 에어컨을 끄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전력 공급에 차질에 생길 수도 있다는 기사를 접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에어컨을 조금 덜 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부터 조금씩 참고 견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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