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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Dec 11. 2022

비 내리는 비자림에서 배운 것

일기예보에서는 오전에 비가 오고 차차 그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모녀는 날씨 요정이라 비 때문에 여행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는 중에도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서 소나기를 피했던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도 금방 그치겠지 싶어 계획대로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비자림을 향해 길을 나섰다. 제주는 일 년에 한두 번 방문하지만 가볼 곳이 워낙 많다 보니 늘 우선순위에서 비자림은 밀려났었다. 출발 전부터 비자림과 사려니 숲길에서 하루를 보내려고 마음먹고 떠나온 여행이었다. 차가 중산간로를 오르면서부터 빗줄기는 조금씩 굵어지더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비가 쏟아졌다. 설상가상으로 바람까지 세차서 우산은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집어져 버렸다. 결국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우리는 홀딱 젖어버렸고, 주차장 입구의 편의점에 줄을 서서 우비를 사서 입었다. 


우비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바지와 신발은 쫄딱 젖은 채로 숲길을 걸었다. 보통 때 같으면 빗속을 뚫고 밖에 나와 돌아다니려는 엄두도 내지 않겠지만 여행지에서는 비에 젖는 일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아이와 둘이 마주보며 낄낄거리고 웃기도 하고, 어차피 신발이 젖은 김에 물웅덩이를 일부러 밟아 상대에게 흙탕물을 튕기기도 하며 아이들처럼 놀아보기도 했다. 


비에 젖어 짙어진 나뭇잎에서 뿜어 나오는 숲의 향기는 비 냄새에 섞여 진하게 풍겨왔다. 비오는 날의 여행은 맑은 날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비가 쏟아져 인적이 드문 숲길을 딸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비자림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요즈음은 유명세를 타는 곳이면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넘쳐난다. SNS에서 입소문을 탄 식당이나 커피숍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흔한 일이고, 풍광이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길게 줄을 서는 모습도 쉽게 보는 풍경이다. 비자림도 맑은 날 왔으면 사람에 치여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을 수도 있는데 비 오는 날 찾으니 마음껏 우리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일상의 번잡함을 떠나 재충전과 힐링을 위해 찾은 여행지에서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생각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동안 나는 여행지에서는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많은 것을 보려고 애써왔다. 그런데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함께라는 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비 내리는 숲이 가르쳐주었다. 다음에 다시 제주를 찾으면 그때는 일정을 잡지 않고 그저 아무 바닷가나 오름을 찾아가 파도 소리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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