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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Jul 26. 2019

다시, 길 위에

                                 by 요술램프

그리움이 사무치는 날강릉 안목해변     

  마음속에는 항상 바다가 있었다. 강원도 바닷가 유년의 시골집에선 눈을 뜨고 마루로 나서면 유리창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였고, 주말에 다녀가는 엄마의 살 냄새가 그리워 보채는 어린 손녀를 등에 업고 흥얼대며 잠재우려는 할머니의 어깨 너머로 오징어 배들의 불빛을 보며 칭얼대다 잠이 들었다. 새벽이면 바다로 나가는 사내들의 고무장화 소리에 얼핏 잠이 깨기도 했다. 바다는 그렇게 유년을 생각하면 비릿한 냄새와 파도 소리와 함께 그리운 사람들의 이미지로 떠올랐다. 하여 나는 어디에서고 바다가 그리웠고 사람들 틈에서 외톨이라는 생각으로 불현듯 서러워지는 순간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두 시간 반을 달려 그곳에 왔다. 늦깎이 재수생인 딸아이의 머리를 식혀줄 겸 떠나온 여름휴가는 또 바다였다. 안목해변, 이제는 관광객으로 가득하고 커피숍들이 바닷가를 차지한 곳이지만 주변 풍광이 아무리 변해도 제 빛깔과 제 소리는 그대로였다. 나도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의 옆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남아, 까맣게 잊고 살다가 생각나면 한 번씩 찾아와서 그리웠노라고 항상 잊지 않았다고,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아이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릴 수 있는 그런 엄마로 살고 싶다.      

 엄마로 사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견디며 아이가 자라듯 엄마도 자란다. 아이는 오랜 길을 돌아서 마음을 잡았다.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많이 겪으며 혹독한 사춘기를 길게 보내고 힘들게 어른이 되어가는 자식에게 해줄 것이 하나 없는 어미는 그저 마음 아프고 미안할 뿐이었지만 그것도 마음뿐 언제나 말은 마음을 배반해서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하고 살아왔다. 평상시에는 어색해서 못하던 마음 속 이야기들을 무심한 척 툭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다. 모래사장을 마냥 걷고 있는 아이를 향해 마음 속에만 있던 말을 꺼내본다.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까마는 내 딸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세상일에 시달려도 견디고 버티며 헤쳐 나가게 하는 힘이다. 힘들어도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내 아이도 그럴 것이다. 돌고 돌아서 오래 걸려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조금 늦으면 어떤가, 어차피 우리네 삶은 마라톤인 것을. 초반부터 힘 빼고 나가떨어지는 것보다 천천히 속도를 조절하며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너의 인생은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나는 눈부신 여름 바닷가에서 아이의 손등을 토닥인다.    

  바다는 언제나처럼 거기에 있었다.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는, 무수한 물거품을 토해내는 파도도 언제나 그렇듯 그곳에 있었다. 그토록 바다가 그리웠던 것은 파도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도저히 삭히지 못할 아픈 내면을 이 악물고 참아내다 마침내, 한계에 다다라 토해내는 그 깊은 울음. 그렇게 속 시원히 울고 다시 말갛게 제 온 곳으로 돌아가는 그 울음소리를 못 견디게 듣고 싶어 날마다 바다에 오고 싶었다. 마음껏 울어본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마음에 난 상처는 딱지가 안기도 전에 또 떨어지고 더 깊이 파이고를 반복하면서 미처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없이 살았던 시간들. 눈물은 자꾸 참으면 말라버리는 것인지 이제는 우는 일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듯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엄마로 산다는 것은 울음도 참고 그 어떤 두려움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강하고 단단해야 한다는 강박(強迫)으로 견디고 또 견뎠던 날들이 파도 소리에 실려 밀려오고 밀려간다.       

    

바다열차는 바다를 끼고 달린다     

  우리가 머무른 숙소는 바다가 보이는 정동진의 산자락에 있었다. 바다와 산이 분간되지 않는 깜깜한 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간간이 바다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여행지에서의 밤은 아무리 쾌적한 잠자리라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게 한다.    

   아침은 작정하지 않았어도 새벽같이 눈이 떠진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일출 시간을 확인한 후 호텔에 딸린 커피숍 전망대로 올라간다. 한여름이지만 해뜨기 전의 산자락은 바람결이 차다. 검푸른 하늘에 서서히 여명이 퍼지고 지루하게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더니 드디어 해가 떠오른다. 천지가 조용한 가운데 우리는 침묵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본다.     

 일몰이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고, 아련하며 뭉클한 감동을 주는 것이라면, 일출은 엄숙하면서도 활기차다. 하루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왠지 다 잘될 것 같은 희망과 기대를 품게 하는 것이 일출의 장면이다.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일출을 지켜보는 마음은 매번 새롭다. 새로운 다짐, 새로운 희망. 어제와 다른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서 있다는 것은 오늘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의 태동(胎動)을 생생하게 실감한다는 가슴 뿌듯함인 것이다.     

    바다열차를 기다리는 정동진 역은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느라 바쁜 사이로 우리는 철길을 조용히 걸어본다. 나란히 이어진 철길. 여행지에서 우리는 늘 함께였다. 엄마, 딸이면서 설레는 여행길을 함께 나서는 동행이었고, 낯선 곳에서 외롭지 않게 해주는 든든한 친구였다. 바다 열차는 동해까지 간다. 딸과 함께 나서는 여행길은 언제까지가 될지 모른다. 언제고 아이에게 엄마보다 소중한 짝이 생기고, 그 시절의 내가 나의 엄마를 소홀히 했듯 가끔 나를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올 것이다. 그것이 순리라는 것을 알기에 딸과 함께 하는 매순간은 마지막이듯이 소중하다. 생겨나면서부터 하나로 연결되었던 모든 엄마와 자식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저 이 넓은 세상에 단 둘뿐인 우리 모녀는 서로가 세상의 전부인 것이다.  

  우리는 지독히도 닮았다. 부모를 닮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을까마는 식성이 똑같고 취향이 똑같고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흥마저 똑같다. 심지어 짜증을 내는 상황마저 똑같다 보니 싸울 때는 전쟁을 치르듯 지독하게 싸우지만 누가 봐도 별나게 붙어 다니는 모녀지간이기는 하다. 함께 가깝고 먼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나누는 이야기와 쌓아가는 추억은 고스란히 아이 인생의 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가족과의 추억,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아름다운 것을 느끼고 볼 줄 아는 마음이 화려한 스펙과 학벌보다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재산이 될 것이라 믿기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반나절, 하루라도 길을 떠나려고 한다.      

  여행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일상의 도시 생활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바쁘게 걸으며 놓쳤던 많은 것들을 세세히 보고 작은 것에도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들고, 시간을 잊고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나를 돌아보며 내일을, 모레를 생각하게 해준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신발 끈을 다시 묶고 앞을 바라보며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이다. 인생길이든 여행길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타성에 젖고 무덤덤해져 둔해진 감성을 벼르고, 세상과 주변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게 하는 데 여행만큼 좋은 게 없는 듯싶다. 세상 곳곳을 돌아본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우리 땅 곳곳의 길 위에도 놓치고 살았던 많은 것들이 여기저기 묻혀서 우리를 기다린다.      

  바다 열차는 푸르디푸른 동해 바다를 끼고 천천히 달린다. 창 밖으로 바다는 계속 펼쳐지지만 똑같은 장면은 한 군데도 없다. 주변 풍광이 조금씩 다르고, 파도가 다르고, 바다 색깔도 다르다. 자연은 매 순간 우리를 새롭고 신선한 감격에 젖게 한다. 자연의 모든 것은 신기하게도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바람결 하나, 나뭇잎 하나, 새 소리 하나도 모두 저마다의 개성과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다르다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인데 무리하게 나와 똑같기를 바라고 나와 같지 않음에 노여워하고 서운해 하며 스스로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문득 스스로를 돌아본다. 자식에게, 친지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제자들에게  나는 얼마나 많이 같음을 강요하고 스스로 상처받으며 상처를 주며 살아왔는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 마음은 까맣게 잊고 또 이전의 속 좁고 근시안적인 나로 돌아가기가 십상이지만 잠깐이라도 나를 돌아보고, 욕심내지 말고 남들과 더불어 나이 먹어가자는 소소한 다짐을 기억한다면 분명 어제와 조금은 다른 오늘, 내일을 살게 될 것이다. 여행이란 이렇게 놓치고 있던 나의 내면을 잔잔하게 가라앉히고 들여다보는 일에 다름 아니다.       

   

다시 일상으로

 삼척의 촛대바위를 끝으로 우리의 여행은 끝났다. 촛대바위를 보러 오르는 길은 제법 길다. 산길을 돌아 오르고 내려오며 사람들은 카메라에 추억을 담고, 저마다의 마음 속에 디지털로는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자잘한 기쁨과 이야기들을 담아갈 것이다. 그 이야기들이 모여 나만의 역사가 되고 나의 인생이 될 것이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떠나올 때와 다르게 숙연하다.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몸이 지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지고, 두고 온 일 생각에 울적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행이란 되풀이되는 일상의 삶에 쉼표 하나 찍어두는 일이고, 다시 씩씩하게 삶의 현장으로 나설 용기를 주는 일이기에 오늘 이 열차를 타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또 새로운 여행길을 떠나게 될 것이다. 씩씩하게 살아낼 내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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