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겪는 중인 이들에게 전하는, 첫 번째 지침서
30대 중반까지는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이 많은 게 분명하다. 결혼이라는 행사를 떠올리면, 일련의 진행 과정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려진다.
하지만 장례는 다르다.
가까운 지인이나 친척의 장례조차 경험이 드물었던 나는 ‘장례식’이라는 의식 앞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손만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바보 같은 상주였다.
죽음 앞에는 선택할 것이 너무나 많다.
우선 근처 장례식장을 찾아야 하고, 사망진단서도 발급받아야 한다. 진단서는 추후 사용할 곳이 많으니 발급처의 안내에 따라 넉넉히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장례식장을 선택하면 운구 준비를 해야 한다.
운구 전 대기하는 곳에서의 안치비용, 운구용 구급차 비용까지 모든 것이 별도다.
결혼식이 기쁨과 축하를 위해 추가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게 한다면, 장례는 슬픔과 애도를 위해 끊임없이 선택과 결제를 강요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용들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모든 것이 돈, 돈, 돈인 차가운 현실이었다. 죽은 사람 앞에 그 돈이 다 무슨 소용이냐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고인이 좋아할 것을 심사숙고하며 고르고, 싫어할 것을 빼는 과정에서 나는 한 번 더 고인을 깊이 복기할 수 있었다.
생전 무엇을 선호했는지, 어떤 취향을 가졌던 사람인지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고인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고르기 위해 눈물을 닦으며 사진첩을 뒤진다. 그리고 영정 사진 주위의 꽃 장식, 빈소 TV에 틀어줄 영상 제작 비용을 선택해야 한다. 그 순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조문객들과 고인의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추억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참고로 보관할 수 있는 USB비용도 추가로 든다. 액자 속 고인의 모습은 마냥 사진을 크게 뽑아 놓은 것 같아, 죽음이라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상조 보험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함께 애도해 주신 장례 지도사님을 만난 덕분에,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차분히 장례를 준비할 수 있었다.
장례지도사와의 만남 이후에도 선택의 순간은 계속된다. 음식의 가짓수, 제례의 종류, 조문객을 위한 떡과 과일의 추가 주문. 빈소 조문객들을 배고프게 보낼 수 없다는 상주의 마음이 결제로 이어진다. 심지어 상주의 양말과 넥타이 같은 사소한 것들조차 정신없는 와중에 미리 준비되어 청구된다.
장지 선택도 큰 과제다.
화장터 예약과 안치 장소를 결정해야 한다. 수목장과 고민 끝에,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봉안당을 골랐다.
참고로 6개월이 지난 지금, 고인이 머무는 봉안당의 분양가가 500만 원이나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음 앞에서도 부동산 논리가 작동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복잡 미묘하다.
이제야 상주가 되어 조문객들을 맞이할 차례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장례 문화는 밤늦은 시각이면 빈소가 고요해지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 적막이 좋았다. 북적이던 조문객들이 떠나고 비로소 남겨진 가족들만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고인을 앞에 두고 미처 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밤새 쏟아냈다. 추억을 안주 삼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은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고, 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샤워를 하며 손님 맞을 채비를 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다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몸을 씻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행위. 장례식장은 죽음을 기리는 곳인 동시에,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장 처절하게 느끼게 하는 기이한 현장이었다.
지인들에게도 고민 끝에 연락했다.
나는 원래 고통을 전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힘든 것을 나누면 힘든 게 두 개가 될 뿐이라 믿는 파워 T 인간으로, 내 침묵이 타인의 일상을 오염시키지 않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지독한 원칙을 깨고 싶었다.
털어놓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은 슬픔에서 잠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내 태도를 두고 왈가왈부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위로받고 싶다는 본능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 부름에 응해준 이들의 모습은 살아있는 내 인생에 감사함을 느끼게 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온 임산부 지인, 아이가 백일도 되지 않아 외출이 조심스러웠을 친구들. 평소 연락 한 번 없다가도 장례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온 친척들. 그리고 끝내 비밀번호를 풀지 못해 포기했던 고인의 휴대폰을 통해 극적으로 연락이 닿은동창들까지. 빈소를 채운 건 산 사람들의 온기였다.
고인은 차갑게 누워 있는데, 남겨진 이들은 온기를 나누며 허기를 채우는 이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서 나는 묘한 부채감을 느꼈다. 산 사람을 위해 위로를 주고받는 상황이 고인에게 죄가 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이제 장지로 간다. 화장터의 불길을 마주한다면, 작정하고 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눈물을 다 쏟아내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라는 응어리에 갇혀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장로를 통해 나온 한 줌의 재로 변한 고인의 유골을 보며 한껏 울고 난 뒤, 고인의 새로운 집으로 간다.
봉안당에 고인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풀리며 몸살 기운이 찾아올 줄 알았다. 이제야 비로소 맘껏 울고 슬퍼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앓아누울 여유조차 아직은 사치다. 상실을 겪은 이들은 이제부터 더 차갑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고인을 충분히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남겨진 자가 완수해야 할 지독한 행정의 절차들이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