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당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여정 (9) - 가톨릭 세계의 수도 바티칸 관람기 I

by 샤를마뉴

국가를 이루는 기본 요소는 세 가지이다.

국가를 공간으로 규정하는 영토,

개인 그리고 사회 공동체로 규정하는 국민,

자주적인 운영을 가능케 하는 주권이 그것이다.


국가를 이루는 세 가지의 기본 요소는

어느 정도의 규모와 체계가 있어야 성립된다.

근대 이후 국가는 '큰 단위의 조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영토와 국민의 규모가 너무 작거나,

주권을 행사하는 체계가 탄탄하지 않은 조직은

국가라고 자처할 수는 있어도, 공인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공인된 국가의 영토를 빌려쓰면서,

인구수는 턱없이 적은데도 인정받는 국가가 있다.

바로 바티칸 시국이다.

이곳 영토의 면적은 0.49km²,

인구수는 500여 명(2025년 기준)에 불과하다.

그래서 바티칸 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라는,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릴 만한 칭호를 가지고 있다.


바티칸 시국의 국가 수반(원수)이

교황이라는 점 또한, 특별함을 더한다.

오늘날 국가 수반의 직함은 정형화되어 있다.

다수의 국가에서는 대통령 또는 총리,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이 잔존한 국가에서는 주석,

입헌군주제의 전통이 이어진 국가에서는 국왕으로

국가 수반의 직함이 정해져 있다.

이렇게 볼 때 교황이 국가 수반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특별하다.


가톨릭교회에 적을 두지 않은 사람들에게

바티칸 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교황이 주인인 국가' 정도로 인식될 것이다.

필자 또한 바티칸 시국에 가기 전까지, 가있는 순간에도

그곳에 대해 아는 것, 관심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갔다온 뒤에는 얘기가 달라졌다.

바티칸 시국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곳의 국가 수반인 교황은 역사에서 어떤 내력을 가지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 동기를 부여한 가장 큰 원인은

이름만 알았던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의 실물을 직접 본 것에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는

세속의 부로 어느 정도까지 성스러움의 표현이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당연히 그 표현 너머에는 역사적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을 곧바로 읽어내지 못했다.

가톨릭교회 신자도 아니며, 종교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지가 앎의 욕구에 불을 지피지 않았나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알아가다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바티칸 시국 관람기를 간략하게 기록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작은 국가라고 해서 역사까지 짧지는 않았다.

한 편의 글에 다 담아내기엔 무리였다.

여러 편의 글로 나눠야만 했다.


오히려 더 잘 된 일이었다.

조금 수고롭더라도, 관람기를 자세하게 기록해

전체 여행기의 완결성을 높이고

차후에 바티칸 시국을 여행할 계획이 있는 독자에게

'문화유산 읽기 도구'로 자리매김시키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바티칸 관람기는 각 글마다 하나의 주제에 집중해,

세 편의 글에 걸쳐 풀어보고자 한다.

서막이 되는 이 글에서는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

두 번째 글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세 번째 글에서는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이 중심 주제이다.


이 관람기의 성격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호기심을 갖고

역사의 관점에서 가톨릭교회, 바티칸 시국을 살펴보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혹여나 독자 중 가톨릭교회 신자가 있을까봐 고지했다.


오후 1시 반, 바티칸 시국을 '걸어서' 입국했다.

그렇다고 입국 수속이 없지는 않다.

로마와 바티칸 시국의 경계에서 소지품 검사를 한다.


성수기에 바티칸 시국을 간다면,

소지품 검사를 받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상당할 듯하다.

입국하려는 사람은 물밀듯이 들어오는데,

입국 수속을 담당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로마에서 바티칸 시국으로 입국하는 관문인 포르타 안젤리카(Porta Angelica), 오른쪽 사진에서 보듯 입국자들이 굉장히 몰린다.
포르타 안젤리카의 라틴어 문구
[원문] Pius IIII* Medices Pontifex Max(imus) Portam
Angelicam** Iuxsta Cassiam*** Aperuit
[해석] 교황 비오 4세는 카시아 가도(도로) 옆에 안젤리카 문을 건설했다.

* 1499~1565(생몰연도)
** 비오 4세의 본명은 조반니 안젤로 메디치(Giovanni Angelo Medici)이다.
그러나 그는 메디치 가문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문의 이름이 '안젤리카'라는
점에서 그의 이름을 따왔음을 알 수 있다.
*** 카시아 가도는 고대 로마의 주요 도로 중 하나였다.

비록 바티칸 시국의 영토 면적은 동네보다도 작지만,

건축물의 크기는 그렇지 않다.

바티칸 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영토가 작다고, 지도자의 그릇이 작지는 않다.'라는 메시지를

웅장한 건축물로써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겼을지도 모른다.


바티칸 시국의 '바깥 공간'은 성 베드로 광장이다.

여기에도 두 개의 웅장한 건축물이 있다.

우뚝 서 있는 바티칸 오벨리스크(Obelisco Vaticano

di Piazza San Pietro)와

좌우 방향으로 펼쳐진 열주(기둥)가 그것이다.


바티칸 시국의 주인공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기에,

성 베드로 광장의 두 건축물을 '지나치듯'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몰랐던 역사 이야기'가 나타난다.

필자도 당시에 두 건축물을 별 감정 없이 지나치듯 봤는데,

그 후에 몰랐던 역사 이야기를 찾아내니

무지를 자각하는 동시에 큰 흥미를 느꼈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 라(Ra)를

숭배하고자 세워진 기념비이다.

오벨리스크를 굳이 정의한 이유가 있다.

바티칸 오벨리스크는 바티칸 시국의 것으로 둔갑된

이집트의 기념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형의 오벨리스크는 두 번 이사를 갔다.

첫 번째로 이사 온 곳은 바티칸 시국 근처에 있었던

네로의 서커스(전차 경기장, Circo di Nerone)였다.

그 후 다시 이사 온 곳이 지금의 성 베드로 광장이다.


성 베드로 광장으로 오벨리스크를 옮겨온 인물은

과감한 추진력을 가진 교황 식스토 5세(식스투스 5세,

Pope Sixtus V/Papa Sisto V, 1521~1590)였다.

오벨리스크가 단순히 멋져보여서 옮긴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교도가 횡행한 로마 시대 위에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교황이 다스리는 중세 시대가 있다.'라는 선전을

건축물로써 보여주려는 게 컸다.


선전을 위한 그의 의지는 진심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 높이 25미터, 무게 330톤의 오벨리스크를

해체해서 옮기고 다시 세우는 작업을 '보통 의지'로는 해내기 어렵다.

그가 교황으로 재위한 기간은

5년(1585~1590)밖에 되지 않아 더 부각되는 것도 있다.

(참고: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 차용구 옮김, 길, 2013, pp.204-205)

1699년에 그려진 네로의 서커스, 가운데에 오벨리스크가 표현되어 있다.
오벨리스크가 네로의 서커스에서 성 베드로 광장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담은 그림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하강(The lowering of St. Peter's Obelisk)>
교황 식스토 5세의 모습(왼쪽)과 바티칸 오벨리스크(오른쪽)

성 베드로 광장의 열주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성된 뒤에 진행된

후속 건축 사업의 결과물이었다.


식스토 5세는 오벨리스크를 광장으로 옮긴 것에 더해,

교황으로 재위한 마지막 해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까지 완성시켰다.

그의 추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는 증거이다.

대성당 내부에는 그가 돔을 완성시켰음을 강조한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다음 글에서 살펴볼 예정이다.


그간 필자는 그 대성당이 레오 10세 재위기(Pope Leo X/

Papa Leone X, 1475~1521)에 완공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대성당을 짓기 위해 면벌부를 대대적으로 발행하여

루터의 종교 개혁을 촉발시킨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면벌부를 발행했다고, 곧바로 대성당의 완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식스토 5세가 큰 과제를 끝내둔 덕분에,

로마, 바티칸의 경관을 바꾸는 작은 과제는

비교적 식은 죽 먹기였을 것 같다.


지난 글에서 슬며시 언급한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는

1657년부터 1667년까지 10년간,

성 베드로 대성당에게 사람을 끌어안을 팔을 붙여주었다.

이 시기에 재위한 교황은 알렉산데르 7세(Pope Alexander VII/

Papa Alessandro VII, 1599~1667)로,

로마의 도시 계획 사업에 관심이 많아 베르니니를 후원했다.


베르니니는 17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닐까 싶다.

로마 그리고 바티칸 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은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이 남아있다.

(참고: 위의 책, pp.212-213)

성 베드로 광장의 열주를 착공할 당시에 발행된 기념 메달
성 베드로 광장의 좌측 열주 (1), 뒤편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보인다.
성 베드로 광장의 좌측 열주 (2), 열주 지붕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 Pont(ifex) Max(imus))'라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의 우측 열주, 왼편으로 바티칸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모습(왼쪽)과 베르니니가 설계하고 지은 그의 무덤(Sepolcro di Alessandro VII) 입구(오른쪽)

보통 건축물에 딸린 정원, 광장 같은 바깥 공간은

건축물의 후광이 너무 크면 가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성 베드로 광장도 그 경우이겠다.


그런데 성 베드로 광장이 없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한 번 상상해보라.

무언가 빠진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기에 건축물에 딸린 바깥 공간의 존재를 무시하면 안 된다.


이 글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살펴보기 앞서,

바티칸 오벨리스크와 열주가 지어진 과정을 중심으로

성 베드로 광장을 살펴보았다.

이 글을 읽고 성 베드로 광장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주제로 한 다음 글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을 것이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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