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전부는 아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여정 (10) - 가톨릭 세계의 수도 바티칸 관람기 II

by 샤를마뉴

바티칸 시국의 중심부는 단연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앞선 글에서 역사 이야기를 알아야 보였던

성 베드로 광장의 바티칸 오벨리스크, 열주와 달리,

이 대성당은 역사 이야기를 잘 모르거나, 가톨릭교회 신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왜 강렬한 인상을 남길까?

이 역시 앞선 글의 비유를 빌리자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가 '세속의 부로 어느 정도까지

성스러움의 표현이 가능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모습을 두고

상반된 관점에서 엇갈린 평가가 가능할 것 같다.

좋게 평가하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인정할 정도로

종교 예술의 영롱함이 잘 표현되었다.

나쁘게 평가하면, 세속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종교 본연의 도리를

지키지 않고 화려함을 표현한 것이므로 속물적이다.


이 글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화려하다.'라는 단순한 평가를 넘어,

더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져 입체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성당의 이름이 되는 성 베드로는 과연 누구일까?

둘째, 대성당은 성 베드로를 위한 공간일까?

성 베드로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일까?

셋째, 왜 성 베드로 대성당은 화려하게 지어야만 했을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를 살펴보며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볼 것이다.


바티칸 시국으로 입국한 뒤, 약 30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자유시간을 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알아서 구경하라는 뜻이다.


그간 여행을 하며 여러 유명한 성당을 봐왔지만,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제대로 구경한 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유일했다.


로마에서 바티칸 시국으로 입국할 때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인파도 매우 많았다.

대성당이 코앞에 있는 것과 곧바로 관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일행끼리 움직일 때는 더 조심해야 한다.

사진을 촬영하겠다고 잠시 멈추거나, 다른 사람들과 뒤섞이면

그 틈에 일행으로부터 낙오될 수 있다.

필자도 그럴 뻔했다.

그렇게 겨우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로 들어왔다.

바티칸 오벨리스크, 성 베드로 광장의 좌우 주랑과 함께 보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
가까이서 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스러운 문(왼쪽, Holy door)과 성스러운 문에 들어선 직후의 내부 모습(오른쪽)

대성당의 입구가 되는 성스러운 문 위를 보면,

석재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와 라틴어 장문이 쓰인 현판이 있다.

해석은 다음과 같다.

석재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
[원문] Paulus V* Pont(ifax) Max(imus) Anno XIII**
[해석] 교황 바오로 5세가 재위 14년째인 해(에 지었다.)***

* 1550~1621(생몰 연도)
** 교황 바오로 5세는 1605년 교황에 즉위했다. 즉, 1619년에 지어진 것이다.
*** 맥락상 해석이다.

현판의 라틴어 장문
[왼쪽 원문] I(J)oannes Paulus II* P(ontifex) M(aximus)
Iterum Portam Sanctam Aperuit Et Clausit
Anno Magni Iubilaei(Jubilee) Ab Incarnatione** Domini MM-MMI
[해석]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주님 강생 2000년
대희년(大禧年, 2000~2001)을 맞아 문을 다시 열고 닫으셨다.

* 1920~2005(생몰연도)
**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강생(降生)이라 한다.

[오른쪽 원문] Franciscus PP(Papa)* Portam Sanctam
Anno Magni Iub(ilaei) MM-MMI
A I(J)oanne Paulo PP II Reseratam Et Clausam
Aperuit Et Clausit Anno Iub(ilaei) Misericordiae MMXV-MMXVI
[해석]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0년
대희년에 열고 닫았던 문을 자비의 희년(2015~2016)에 다시 열고 닫으셨다.

* 1936~2025(생몰연도)

현판 내용의 핵심은 '희년에 교황이 문을 열고 닫았다.'이다.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현판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희년'과 '교황이 문을 열고 닫는 행위'의 의미를 고찰해야 한다.


살면서 특정한 날짜와 해를 기념하는 순간이 종종 있다.

생일, N주년 행사가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희년은 가톨릭교회에서 특별히 기념하는 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현판의 왼쪽 부분 원문에 언급된 '주님 강생'은

가톨릭교회에서 분명히 기념할 만한 사건이다.

그런데 주님이 강생한 지 '2000년'이 되었다면,

본래도 기념할 만한 사건을 '더 특별하게' 기념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희년 앞에 대(大)가 붙은 것이다.


희년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보니파키우스 8세,

Pope Boniface VIII/Papa Bonifacio VIII, 1235~1303)가

1300년에 처음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특정한 주기마다 성년을 기념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성년 기념 주기
1300~1343년: 100년 -> 1343~1398년: 50년
-> 1398~1470년: 33년 -> 1470~현재: 25년

(참고: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 차용구 옮김, 길, 2013, p.173)


교황이 문을 열고 닫는 행위는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으로 간주되는 성 베드로(St. Pietro,

1?~67?)의 '매고 푸는 권한'과 관련이 있다.

이 권한은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8~19절에서

"너는 베드로이다. 나(그리스도)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라고 언급이 된다.


즉 성 베드로만이 가진 특별한 권한이 있는데,

그것을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교황이

'성 베드로의 이름이 붙은 대성당'의 성스러운 문을

열고 닫는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라 보면 된다.

(참고: 위의 책, pp.48-50)


2025년은 2000년 대희년 다음의 희년이었다.

희년에는 성스러운 문을 열어둔다.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1523)가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8~19절을 주제로 그린 <열쇠의 전달(Consegna delle chiavi)>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진 성 베드로의 그림이 걸려있는 문
문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
[원문] Clemens X Pont(ifax)* Max(imus) Anno lubil(a)el MDCLXXV**
[해석]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1675년 희년(에 문을 지었다.)***

* 1590~1676(생몰연도)
** 로마 숫자로 10을 의미하는 X가 육안으로는 하나만 보이는데,
접히는 부분을 잘 보면 X가 하나 더 표기되어 있다.
만약 X가 하나여서 MDCLXV, 즉 1665년이라면,
클레멘스 10세가 교황으로 재위한 기간인 1670~1676년과 맞지 않고,
25년 주기로 돌아오는 희년과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1675년이 맞다.
*** 맥락상 해석이다.

매고 푸는 권한을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성 베드로가 누구인지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의 답까지 알아냈다.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찾아보자.

성 베드로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연히 대성당은 그를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대성당이 성 베드로'만'을 위한 공간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결국 대성당을 지은 건 성 베드로 이후에 재위한 교황들이다.

그들의 흔적 또한 곳곳에 남아있다.


게다가 '유명한 예술가의 흔적'도 있다.

대성당에 막 들어오면, '어디서 많이 본' 조각상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바로 미켈란젤로의 바티칸 피에타(Pietà Vaticana)이다.


미켈란젤로는 화려한 바티칸 피에타를 불과 24살에 만들었다.

젊은 나이에 숭고한 주제의 작품을 만든 점에서

칭찬을 받을 만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숭고함보다 '화려함'이 강조됐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숭고하지 않은 피에타는

신성 모독 내지 고인 모독으로 간주한 것 같다.

피에타는 그리스도(예수)의 시신을 두고

성모 마리아가 애도하는 주제의 작품이니 그럴 만하다.


두 눈으로 직접 본, '원본의' 바티칸 피에타는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 맞다.

현대인이 봐도 숭고함보다는 화려함이 강조되는

인상을 받는 것 같다.


다만, 완전 가까이서 보지는 못한다.

1972년에 바티칸 피에타가 훼손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이후,

방탄유리로 그것을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 사진으로 바티칸 피에타의 정교한 모습까지

잘 담기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참고: 주경철, 『중세 유럽인 이야기』, 휴머니스트, 2023, pp.329-331, 335)

바티칸 피에타, 오른쪽 사진에서 보듯 방탄유리로 보호되어 있다.
1972년, 바티칸 피에타가 훼손당하는 사태를 담은 사진, 이 사태로 인해 성모 마리아의 코와 팔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유명한 예술가의 흔적도 인상적이지만,

그못지 않게 후임 교황들의 흔적도 많이 남아있다.

그 흔적을 보다 보면, 성 베드로의 이름을 '붙여쓴'

후임 교황들의 대성당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러 교황의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조각상들,

식스토 5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완공했음을

강조하는 라틴어 문구의 존재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근거를 제공한다.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인노켄티우스 12세, Pope Innocent XII/Papa Innocenzo XII, 1615~1700)의 모습(왼쪽)과 그의 조각상(오른쪽)
교황 인노첸시오 12세 조각상의 라틴어 문구
[원문] Innocentii XII P(ontifax) M(aximus) Inornatum Monumentum
In Hanc Elegantem Forman Redigi Curavit
Adprobante Benedicto XIV PM
Vincentius S(anctae) R(omane) E(cclesiae) Card(nalis) Petra
Ep(iscopus) Praen(estinus) M(agnus) Po(a)eniten(tiarius)*
A(nno) S(alutis) MDCCLXLVI
[해석]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의 간소한 기념비를,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승인을 받아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이자 프라에네스테 주교이자
내사원(內赦院)의 장인 빈첸초 페트라**가
구원의 해인 1746년에 우아한 형태로 바꾸었다.

* 내사원은 교황청에 있는 법원 중 하나이다.
** 1662~1747(생몰연도)
교황 베네딕토 14세(Pope Benedict XIV/Papa Benedetto XIV, 1675~1758)의 모습(왼쪽)과 그의 조각상(오른쪽)
교황 베네딕토 14세 조각상 라틴어 문구
[원문] Benedicto XIV Pont(ifax) Max(imus)
G(eneralis) R(omanae) E(cclesiae) Cardinales Ab Eo Creati
[해석] 교황 베네딕토 14세로부터 선택된(임명된) 보편 로마 교회 추기경들
교황 레오 12세(Pope Leo XII/Papa Leone XII, 1760~1829)의 모습(왼쪽)과 그의 조각상(오른쪽)
교황 레오 12세 조각상 라틴어 문구
[원문] Memoriae Leonis XII P(ontifax) M(aximus) Gregorius XVI PM*
[해석]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그레고리우스 16세)가
교황 레오 12세를 기억하기 위해 (조각상을 세웠다.)**

* 1765~1846(생몰연도)
** 맥락상 해석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돔 아래에 있는 교황 제단(왼쪽)과 돔 내부(오른쪽), 교황 제단의 덮개는 판테온의 것을 가져와 만들었다.
돔 천장의 라틴어 문구
[원문] S(ancti) Petri Gloriae Sixtus PP(Papa) V
Anno MDXC Pontif(icatus) V
[해석] 성 베드로의 영광을 위해 교황 식스토 5세가
재위 5년째인 1590년에 (돔을 만들었다.)*

* 맥락상 해석이다.

(참고: 호르스트 푸어만, 위의 책, pp.203, 211)


한편으로, '그럼에도 성 베드로가 주인인 대성당'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성 베드로가 없으면, 후임 교황들도 없기 때문이다.


앞서 본 돔 천장의 라틴어 문구를 다시 살펴보자.

첫머리에 '성 베드로의 영광'이 언급된다.

그리고 사진으로 잘 담기지 않았지만,

교황 제단의 덮개가 있는 위치의 천장에는

'Tu Es Petrus Et Su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라는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8~19절을

설명하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참고: 위의 책, p.48)


교황 제단 옆으로는 성 베드로의 청동상이 있다.

마치 성 베드로가 교황 제단을 지켜보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청동상 위로는 교황 비오 9세(Pope Pius IX/Papa Pio IX,

1792~1878)가 성 베드로만큼 교황으로 오래 재위한 것을

기념하는 현판이 있다.

다시 성 베드로의 이름을 붙여쓴 후임 교황들의 대성당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성 베드로의 청동상(왼쪽)과 교황 비오 9세가 오래 재위한 것을 기념하는 현판과 함께 본 성 베드로의 청동상(오른쪽)
교황 비오 9세의 모습(왼쪽)과 그가 교황으로 오래 재위한 것을 기념하는 현판(오른쪽)
현판의 라틴어 장문
[원문] Pio IX Pont(ifex) Max(imus) Qui Petri Annos
In Pontificatu Romano Aequavit Clerus Vaticanus
Sacram Ornavit Sedem XVI Kal(endas) Quint(ilis)* A MDCCCLXXI
[해석] 바티칸 성직자들은 1871년 7월 초하루의 16일 전에
로마 교황직에서 성 베드로의 재위 기간과 유일하게 필적**하는
교황 비오 9세를 위해 거룩한 교황좌를 장식했다.

* 퀸틸리스는 1년을 10달로 나누는 로마 달력에서 다섯 번째 달에 해당한다.
1년을 12달로 나누는 그레고리우스 달력을 기준으로 하면 7월이다.
Kalendas는 초하루를 의미한다. 따라서 'Kal Quint'는 7월 1일이다.
7월 1일로부터 16일 전인 6월 16일에 교황좌를 장식했다.
** 교황 비오 9세의 재위 기간은 32년(1846~1878)으로,
(교회 측에서 주장하는) 성 베드로의 교황 재위 기간인 34년과 견준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다.

성 베드로를 위한 대성당이기도 하고,

성 베드로의 뒤를 잇는 교황들의 대성당이기도 하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엇갈린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이 시작된 16세기는

'르네상스 시대'이자,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르네상스 시대로 규정한 16세기는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날개를 펼쳤던 '문화의 부흥기'이며,

과도기로 규정한 16세기는 떠오르는 세속(정치)의 영향력과

이를 견제하려는 종교의 영향력 간의 '신경전'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화려함은

세속의 부까지 거머쥘 수 있었던 종교의 영향력과

천재적인 예술가의 재능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며 가톨릭교회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예술가를 동원해 유구한 교회의 전통을 집약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세속의 영향력이 점차 종교를 위협하고,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었다.

이 문제의식은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증명된 바가 있다.


이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

이 글에서는 그 다양한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

불가피하게 분량이 무거워지는 선택을 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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