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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3분 서양사

비운의 중세, 농노에게 정의는 허상이었을까?

『야만의 시대』세부 내용 소개

by 샤를마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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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정보 정리

세부 내용 소개에 앞서 책의 등장인물 정보를 간략히 정리하겠습니다. 이를 참고하시면 세부 내용 이해가 수월할 것입니다.

[1] 마르셀
- 주인공, 본래 농노였으나 오귀스탱 신부의 도움으로 외브쿠르 영주의 아들과 함께 교육받아 출세함.
- 시니 수도원에서 11년간 감금되는 곤욕을 겪다가, 석방된 뒤 프로쿠르의 농노 마리와 결혼함.
- 마리의 아버지(마르셀의 장인)인 자크 카이에와 자크리의 난에 참여했다가 처형당함.

[2] 오귀스탱 신부
- 마르셀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
- 세속화, 부정부패로 물든 가톨릭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본래의 그리스도교 정신'을 추구하는 인물

[3] 자크 카이에
- 마르셀과 오귀스탱 신부가 프로쿠르에서 우연히 만난 농노, 마리의 아버지
- 봉건 사회 속 영주의 착취에 대한 부당함을 인식하고, 자크리의 난을 주도했으나 처형됨.

[4] 영주
(1) 외브쿠르 영주
- 농노를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다른 영주와 달리, 농노를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선한 영주'
- 도마르 영주와 전쟁을 벌인 후 그가 살해되자, 파문되어 영주 지위를 잃게 됨.
(2) 프로쿠르 영주
- 외브쿠르 영주처럼 선한 영주였으나, 이웃 영주인 제롬 드 베스에 의해 영주 지위를 잃게 됨.
(3) 도마르 영주
- 농노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악덕 영주, 외브쿠르 영주와 전쟁을 벌였으나 살해됨.
(4) 제롬 드 베스
- 기존 프로쿠르 영주를 몰아낸 뒤 그 자리를 차지함.
- 마르셀이 결혼한 마리와 첫날 밤을 보내는 걸 방해(영주는 초야권을 행사할 수 있었음)하는 등 악덕 영주였으나 오귀스탱 신부의 영향으로 점차 교화됨. 교회로부터 파문받은 후 살해됨.

세부 내용 소개

'가진 자는 나쁘고, 없는 자는 선하다'라는 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필자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념은 중세 시대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기독교)가 모든 계층의 일상생활에 깊숙히 뿌리를 뻗은 그 시대에 부는 한낱 속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청빈(淸貧)이야말로 안온한 내세를 준비하는 삶의 자세였습니다. '가짐'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가 공고한 지금도, '가진 자는 나쁘고, 없는 자는 선하다'라는 말은 은연중에 살아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여러 방법으로 가진 자를 정당화합니다. 가진 자는 그만큼 노력을 많이 했고, 뒤따르는 책임도 크다와 같은 논리로 말이죠. 하지만 가지지 않은 자는 '직접 가져보기 전'까지는 가진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지지 않은 자 중에도 분명히 가지기 위한 노력을 했는데 풀리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까요. 가지지 않은 자의 불만은 곧 관점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됩니다. 불만이 고조되면 폭발하기도 합니다. 사회는 늘 '가지지 않은 자를 어떻게 가지게 할까?'라는 고민을 안고 삽니다. 가지지 않은 자를 정당화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Reeve_and_Serfs.jpg 착취당하는 농노(Villein, 빌렝)를 표현한 그림
Louis_I_of_Naples_-_Order_of_the_Knot.jpg 주종 의식을 표현한 그림, 오른쪽의 롤랑(?~778)이 왼쪽의 샤를마뉴 대제(748~814)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책의 주인공 마르셀도 가지지 않은 자였고,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책의 초장(제1부)부터 가지지 않은 자의 시선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영주는 권력과 재산을 갖고 죄를 짓고도 당당한 데에 반해, 농민은 언제나 힘없고 가난하며, 고통을 당하면서도 선행을 베풀었다(책의 p.38)."라는 서술을 보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명한 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지금도 죄를 짓고도 당당한 '가진 자'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어서 영주 간에 행해지는 주종 의식(봉신이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에 대해서도 "영주들에게는 신성하지만 어리석은 이 의식"이라 말하며, 인간의 지배욕, 권력욕에 대한 추악성을 언급합니다(책의 pp.43-44). 흔히 말하는 높으신 분의 접대를 꼬집는 내용입니다. 민중의 가진 자에 대한 증오를 솔직히 담은 서술, 역사에서는 보기 힘듭니다.

가지지 않은 자에게 갑자기 가짐을 주면 어떨까요? 그것을 예로 들면, 돈을 힘들게 벌고 있는데 억대 상금을 주는 복권이 당첨된 상황인 것입니다. 일단 기쁘겠죠? 그 후에는 생활양식, 생각 등에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가진 자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과정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듯이, 사람도 똑같습니다. 마르셀은 그에게 공부를 권유한 오귀스탱 신부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외브쿠르 영주 덕에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이 공식적으로 상승한 건 아니니 어찌보면 '특권'을 얻은 셈입니다. 마르셀도 가지지 않은 시절을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종의 신분'이었던 오귀스탱 수도사의 조언을 따르며 잊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마르셀이 '예외적인 인물'의 특성을 띄게 됩니다.

가진 자도 '돈만 가진 자'와 '돈 외의 것까지 가진 자'로 나뉩니다. 돈은 많은데 행실이 별로라면 사람들의 존경을 얻지 못합니다. 반면, 돈도 있는데 덕을 베푼다면 사람들의 존경을 얻습니다. 이 대비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외브쿠르 영주와 도마르 영주 간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서 돈만 가진 자와 돈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진 자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도마르 영주: 당신, 적어도 그들에게 부역은 잘 맡기시오?
외브쿠르 영주: 네, 한 달에 이틀은 동원합니다.
도마르 영주: 한 달에 이틀이라니! 우리 농노들은 열흘만 부역에 동원해도 좋다고 하는데.
외브쿠르 영주: 나는 이미 너무 불쌍해 보이는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요.
도마르 영주: 그들은 그러려고 태어나지 않았소?

도마르 영주: 외브쿠르 영주, 당신 아들한테 글 읽는 것을 배우게 하다니, 당신은 그 정도로 어리석단 말이오?
외브쿠르 영주: 글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배우도록 할 작정이오.
도마르 영주:
나도 그러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소. 어떤 결과가 생길지 미처 알지 못한 까닭이오. 아들은 글을 배웠소. 10자를 깨우치지가 무섭게 그 애는 그런 사실에 엄청난 거만을 품었소. 외브쿠르 영주. 아들을 학식으로 키우면 당신을 얕잡아 볼 것이오. 당신 종들을 배우게 하면 언젠가는 그들이 당신의 주인이 될 것이오.

- 마르셀, 『야만의 시대』, 콜랭 드 플랑시 편역, 김용채 옮김, 나남, 2023, pp.61, 64-65.
1757531745?v=1 『야만의 시대』원서(콜랭 드 플랑시의 불역본)

반면, 가지지 않은 자라도 가진 자보다 머리가 뛰어난 경우도 있습니다. 민중은 이런 사람에게 희망을 걸기도 합니다. 책의 후반부(제2부, 3부)에 등장하는 자크 카이에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프로쿠르 영주(선한 영주가 아닌 악덕 영주)의 악행을 주교에게 얘기해 영주를 바꾸고, 평소 봉건적 착취에 대한 부당함을 느끼고 기회를 엿보다가 자크리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그는 분명히 머리가 비상했습니다. 예속된 상태에 익숙해지면, 정신도 예속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크 카이에는 정신마저 예속된 사람은 아니었기에, 일개 농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부당함에 맞섰습니다. 보통의 농노라면 감히 악덕 영주를 고발하고, 반란을 일으킬 용기를 가지지 못했겠죠. 이는 마르셀의 형 가스파르가 영주의 착취를 피해 도망가자고 제안할 때, 아버지가 "힘 약한 사람은 힘센 사람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고, 하느님도 그것을 원한다(책의 p.47)"라며 만류한 데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크 카이에도 예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 법칙은 '세상은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깁니다. 만약 이 책이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모티프를 따른다면, 자크 카이에가 일으킨 농민 반란은 성공을 거두고 사회 질서가 올바른 방향으로 변혁되어 행복하게 사는 결말로 마무리됐을 겁니다. 하지만 자크리의 난이 실패로 끝났다는 '역사적 평가'가 말해주듯이, 결말은 암담했습니다. 반란이 개시된 후, 자크 카이에를 중심으로 하는 군대는 프로쿠르를 '영주 없는 땅'으로 만들고 헌법을 제정해 농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이렇게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이내 다른 영주들 그리고 국왕(샤를 5세, Charle V, 1338~1380)이 연합군을 결성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습니다. 반란을 주동한 자크 카이에는 처형되고, 마르셀 역시 반란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다가 1369년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자크리의 '난(반란)'으로 이 사건을 명명합니다. 사회의 흐름을 바꿔낸 혁명이 아닌 거스른 반란으로 남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책의 씁쓸한 결말은 예고되었습니다. 정의로운 등장인물은 모두 고초를 겪거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선한 영주는 다수의 악덕 영주와 그들을 변호하는 교회에 의해, 영주 자리를 박탈당하게 되고 오귀스탱 신부도 민중에게는 자애로운 종교인이었지만, 종교인 사이에서는 외면받는 존재였습니다. 악한 사람이 선해지는 것도 사회에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프로쿠르 영주 자리를 차지한 제롬 드 베스도 여느 악덕 군주였는데, '천국에 가지 못하겠다'는 두려움으로 오귀스탱 신부의 조언을 듣고 점차 선정을 베풉니다. 그러나 그도 머지않아 영주 지위를 박탈당하고 살해됩니다. 지배층인 영주조차 봉건 사회의 법칙을 거스르면 끝이 좋지 않은데, 민중이 거스를 때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변질된 지 오래였습니다.

마르셀도 자크리의 난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자신의 운명 그리고 역사에서의 평가가 어떨지를 안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영주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농노들이 노예 사슬 아래서 떨고 있는 한, 불행한 자크리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전쟁을 강도짓이라 덧칠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멋대로 비방할 수 있는 불쌍한 농민들이기 때문이다(책의 p.285)."라고 한탄하듯 회고합니다. 처형 직전에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불행한 시대에는 선을 행하면 망한다(책의 p.289)"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들이 정말 시대를 관통합니다. 이제 봉건 사회는 옛말이 된 세상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용인되는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선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비록 마르셀의 현생은 불행했지만, 역사에서는 드문 '민중 관점의 기록'을 남겼기에 특별히 기억될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기록을 쓰는 세상입니다. 민중 관점의 기록도 많이 축적되었고, 축적되는 중입니다. 거기에는 사회 비판, 풍자와 같은 메시지도 들어가겠죠. 그렇다면 그 기록들이 시간이 지나 후대에 지금을 평가하는 사료가 될 때, 후대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수식어를 붙일까요? 야만이라는 단어로 규정된다면, 혹은 그렇지 않는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비롯될까요? 이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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