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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3분 서양사

농노가 역사를 증언하다

『야만의 시대』개관

by 샤를마뉴
『야만의 시대』책 표지

책 정보

저자: 마르셀(Marcel, 1312~1369)

제목: 『야만의 시대』

옮긴이: 콜랭 드 플랑시(불역), 김용채(한역)

출판사: 나남

발행 연도: 2023년

쪽수: 297쪽

가격: 18,000원(교보문고 정가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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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개관

농민봉기와 민중의 반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피지배층은 생계를 위해 현실을 조용히 그리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 계층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건, 불만과 힘듦이 극에 달했다는 메시지입니다. 사회적 병폐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런데 피지배층의 일탈은 대개 실패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역사에서도 반란이 '진압됐다'라는 평가를 주로 내리지, 반란을 일으킨 사람 또는 세력의 '사연'을 들어볼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세상의 법칙이 원래 그렇듯이, 패자는 승자에 가려집니다.

민중이 직접 쓴, 혹은 민중의 관점에서 쓴 기록은 희귀합니다. 『야만의 시대』도 바로 그런 기록입니다. 저자 마르셀은 본래 중세 시대 프랑스의 농노였으나 오귀스탱 신부의 도움으로 외브쿠르 영주의 아들과 함께 교육받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외브쿠르 영주가 다른 영주와 달리 인간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굳이 신경쓰고 잘 대해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외브쿠르 영주와 마르셀 두 사람은 시대의 일반적인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 '예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던 농노 신분의 사람이 기록을 남긴 것 또한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록은 조용히 묻혀있다가 콜랭 드 플랑시(1794~1881)가 가치를 알아보고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덕분에 평범한 민중의 내러티브, 즉 역사가 말하지 못한 이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300-1800 유럽 인구 그래프.png 중세 말기인 1300~1500년에는 인구 급감이 두드러졌다.
자크리의 난.jpg 135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크리의 난을 표현한 그림

책 내용의 핵심이 되는 자크리의 난(농민전쟁)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여기에서는 그 역사적 배경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중세 말기에는 사회경제적으로 혼란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인구의 감소였습니다. 인구가 증가하고, 그것을 지탱하려면 농업 생산성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농업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은 노동력을 절감하는 방법과 지력(地力)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중세 유럽은 전자의 방법으로 고대에 비해 농업 생산성의 향상을 어느 정도 실현했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방법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화학 비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료는 토지가 어떻든 일정한 생산량을 담보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토지가 비옥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증가분만큼 인구를 부양하려면 척박한 토지에도 농사를 짓고 봐야 하며, 자연스럽게 농업 생산성의 감소로 이어집니다.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던 15세기는 인구가 감소하는 국면에 있었습니다.

[A] 인구가 적을 때:
부양할 인구가 적어 비옥한 토지를 중심으로 농사 -> 농업 생산성 향상 -> 사람들의 평균 영양 상태 양호 -> 인구 증가 국면[B]으로 이행

[B] 인구가 많을 때:
부양할 인구가 많아 척박한 토지까지 개간해 농사 -> 농업 생산성 감소 -> 사람들의 평균 영양 상태 열악 -> 인구 하락 국면[A]으로 이행

- 중세 유럽은 [A]와 [B]의 과정을 반복, 이른바 '거대한 숨쉬기 운동'

참고: 박윤덕 외, 『서양사강좌』(개정증보판), 아카넷, 2022, pp.216-217.
Egyptian_plague_of_boils_in_the_Toggenburg_Bible_0.jpg 흑사병 환자를 표현한 그림
백년전쟁.jpg 백년전쟁을 표현한 그림, 왼쪽 아래에 깃발을 든 사람이 바로 유명한 잔 다르크이다.

중세 말기 인구 감소는 보편적이고 점진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영향이 서서히 나타났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중세 말기의 혼란을 촉발시킬 순 없습니다. 흑사병(페스트)의 유행이 바로 중세 말기의 혼란을 심화시킨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질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흑사병은 농업 생산성의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국면으로 접어드는 중에 기름을 끼얹는 영향으로 작용했습니다. 흑사병의 유행은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급진적'인 현상이었던 셈입니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늘 민중입니다. 정작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는 뒤에 숨습니다. 중세 말 프랑스는 영국과 백년 전쟁(1337~1453)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중세 말기 프랑스를 혼란케 한 '특수적' 요인입니다. 다만, 이 전쟁은 민중이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중세의 전쟁은 오늘날의 전쟁과는 다른 개념, 다른 형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국왕을 비롯한) 영주는 비상상황 시에 특별세(Special-aids)를 요구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백년 전쟁 초기 당시 사람들은 그 전쟁을 잠깐의 비상상황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특별세도 정기적으로 걷는 세금으로 변화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프랑스가 근대 국가로 발돋움한 경제적 요인(조세 제도)으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민중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상황이 다릅니다. 영주의 봉건적 착취는 여전한데다, 전쟁까지 일어나 국가는 혼란하니 누가 민중을 지켜주겠습니까?

이러나 저러나 형편이 나아지지 않으면, 민중의 입장에선 '뒤엎는' 도박을 택할 만합니다. 그것이 곧 역사에서 말하는 농민봉기 내지 반란이 됩니다. 자크리의 난이 일어나기 전, 마르셀의 장인이 되는 자크 카이에가 농민군을 모아놓고 연설한 아래의 내용은 '뒤엎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수 세기 전부터 우리는 땅의 노예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굴종 상태에 놓여야만 하도록 우리 조상은 무엇을 했으며,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괴물이 우리의 재산을 몰수하고 우리를 극도로 힘든 노동에 시달리게 하며, 우리 아내들의 순결을 훔치고 그의 변덕에 따라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주들을 겁낼 것 있습니까? 프랑스가 전쟁할 때, 그리고 영지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 누가 승리를 쟁취했습니까? 우리입니다. 우리 영주들은 우리 전투 대열 뒤에서 위험을 피해 숨어 있다 모든 영광을 누렸습니다. 영국인들이 우리나라 지방까지 쳐들어온 이 전쟁(백년 전쟁)에서 우리가 우리의 왕들을 위하고 우리의 영주들을 위해 용기를 발휘한들, 우리가 용감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때 우리가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한들, 이후에 우리는 무엇이 되는지요?

- 마르셀, 『야만의 시대』, 콜랭 드 플랑시 편역, 김용채 옮김, 나남, 2023, pp.253-254.

책 자체는 마르셀 개인의 험난한 일생, 자크리의 난에 대한 경험을 풀어놓은 회고록이라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너머의 역사를 보면 중세 말기의 혼란한 상황, 봉건 사회 하에 착취받는 민중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제목처럼 '야만적'입니다. 마르셀도 본래 농노 출신이었으니 그 야만을 겪은 사람이죠. 세부 내용 소개에서는 책의 줄거리를 통해 중세 유럽의 현실을 자세히 짚어보고,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가 주는 의의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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