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그녀는 7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능력 있는 목수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의 절이며 집을 지었고 많은 돈을 벌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꾼이었다. 돈을 벌면 버는 데로 술을 마셨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술 잘 사는 호인이었지만 아내에게 생활비는 주지 않았다. 7남매가 먹고살기 위해 공부 잘했던 둘째 딸은 눈물을 머금고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했다. 신발공장에서 미싱 바늘에 손을 찔리기를 여러 번했고 그럴 때마다 대충 약 바르고 다음 날도 출근했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돈을 벌었다. 바늘에 찔린 피값으로 그녀의 동생들은 자랐고 드디어 고된 노동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선을 보았다. 그녀가 결혼할 남자는 3대가 함께 사는 5남매의 첫째 아들이었다. 결혼 후 집안의 가사는 모두 그녀의 차지였다. 남편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남편과 4명의 동생의 밥이며 설거지, 빨래를 매일 했다. 9명의 밥과 설거지, 빨래를 해야 했던 그녀에게 결혼은 고된 노동에서 탈출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노동의 현장이었다. 남편은 뱃사람이었다. 일 년에 절반 이상 집을 비웠고, 그녀는 혼자 남아 자신의 가족이 아닌 남편의 가족을 돌봐야 했다. 많은 날을 눈물로 지새웠다. 그렇게 5년을 매일같이 밥과 빨래를 했다. 그러는 동안 두 아이가 태어났고, 첫째가 나다. 어머니는 대가족을 수년간 먹여 살린 후 겨우 분가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 너무 행복하셨다. 대가족 사이에서 남편 없이 눈물 흘리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아들과 딸을 위해 상을 차리셨고 빨래를 해주셨다. 그리고 가족들 먹여 살릴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일하러 가셨다. 자식들 학교 보내기 위해 미싱을 밟으셨고 미싱 바늘에 손가락이 찔렸지만 약만 바르고 다시 일하러 가셨다. 그렇게 바늘에 찔린 피값으로 나와 동생은 자랐다.
어머니는 참 치열하게 사셨다. 당신이 배우지 못한 설움이 커서 자식들은 꼭 대학에 보내려고 하셨다. 어려서부터 가족들을 보살피기 위해 공부를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고, 결혼 후 남편 없는 시댁살이로 가슴에 한이 맺히셨다. 분가 후에는 말 안 듣는 남편 때문에 속앓이를 하시며 사셨다. 시간이 흘러 자식들 모두 취업하고 결혼도 해서 이제 한시름 놓고 살만하다고 좋아하시던 어느 날 어머니의 응어리졌던 가슴에 암이 생겼다.
어머니는 당당하셨다. 가슴속 응어리졌던 암을 도려내, 극복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열심히 사신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김장철이라 김치를 담그려 하는데 체력이 떨어져서 혼자 하시기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하신다. 어머니와 김치를 담그면서 옛날 얘기를 참 많이 했다. 지금은 줄었는데 옛날 대식구를 먹이려면 김장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는 젊어서 힘든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늙어서 몇 포기 담지 않는데도 힘들다고 아쉬워하신다.
김장을 끝내고 일어나는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어머니는 이렇게 힘든 김장을 몇십 년 동안 묵묵히 혼자 하셨다. 손을 씻으시는 어머니의 손을 봤다. 미싱 바늘에 찔리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며 생긴 힘든 노동이 어머니의 손가락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청소와 뒷정리를 하며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다시 태어나면 꼭 내 딸로 태어나셨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공부도 많이 시켜드리고 대학교도 꼭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웃기지 마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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