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정관념에 빠져서 다른 사람의 재능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면 상대방은 스스로가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기분에 시달리고, 우리 역시 그들이 집단의 성과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놓치고 만다.
우리가 마음 챙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 자신이 서 있는 맥락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다. 스스로 맥락을 만들 때 우리는 더 진정한 자신이 되기 쉽다. 마음 챙김은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변화의 가능성을 믿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 엄격한 업무 절차와 규칙에 얽매여 갑갑함을 느낄 때, 그 절차와 규칙이란 것이 사실 처음에는 몇몇 개인의 결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사람들은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편향과 필요를 가지고 살았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좀 더 많은 이가 자신의 일을 능력과 삶에 맞게 다시 설계해야겠다고 마음먹을 것이다.
우리는 고정관념에 빠져서 다른 사람의 재능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면 상대방은 스스로가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기분에 시달리고, 우리 역시 그들이 집단의 성과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놓치고 만다.
통제력을 잃는 것은 곧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것
우리는 마음 놓침 상태일 때 현명한 선택을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통제력이 제한된다. 광고업자들은 마음 놓침을 광고에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한 가지 강력한 방식은 바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한 가지 원인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닫힌 마음으로 원인을 단정하고 나면 찾아볼 수 있는 해결책의 범위가 몹시 좁아진다.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낸다
마음 놓침 상태의 사람이 완고하게 기존의 범주에 의지하는 반면, 마음 챙김 상태의 사람은 계속해서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낸다. 아이들은 세상에 숙달되어 감에 따라 범주화와 재범 주화를 거듭하고 사사물에 어떤 명칭을 붙였다가 다시 새로 붙이는 일을 자연스럽게 해낸다. 이런 과정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적응행동이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프로이트는 아동기에 이루어지는 창조와 숙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인이 되면 새로운 범주를 만드는 걸 꺼린다. 우리는 결과 지향적 태도 때문에 아이처럼 사물에 장난스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치료를 받거나 위기를 계기로 동기가 생기거나 하지 않는 한 과거를 재범주화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때때로 현재의 상황이나 불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는 하지만 그 과거의 사건이나 인상이 처음 저장된 방식을 바꿀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직장이나 편견 등의 문제에서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범주를 만들고 대상의 특성을 세분화하면 많은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다.
마음 챙김 상태라는 것은 곧 새로운 정보에 개방적인 상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범주 만들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보의 수용은 살아 있는 생물의 기본적인 활동이다. 실제로 새로운 정보가 결핍되는 것은 생물에게 해롭다. ‘감각 차단 sensory deprivation’에 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잠수함이라든지 인공적으로 어떤 자극도 못 느끼도록 만든 방과 같이 아무 자극을 주지 않는 환경에 오래 갇혀 있으면 갖가지 심리적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자극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양상이 반복적이고 변화가 없는 것으로 지각되는 경우에는 감각 체계가 활동을 정지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아서다.
여러 가지 관점이 공존한다.
똑같은 생각, 똑같은 사람, 똑같은 사물이라 하더라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농장 주인에게는 소가 스테이크 감이지만 힌두교도에게는 성물이고 분자생물학자에게는 유전자와 단백질의 집합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챙김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특정한 결과를 얻는 특정한 방법을 미리 알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언제나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음을 의미한다.
정신의 유연성을 키우려 할 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 눈에 부정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 사람으로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관찰자 입장에서 그 행동의 이유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라 할지라도 행위자가 의도적으로 인색하게, 또는 냉혹하게, 까다롭게, 고집스럽게, 칠칠치 못하게, 경솔하게, 무모하게 행동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사실상 모든 행동이 관점에 따라서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그런대로 참아줄 만하거나 정당화될 수 있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바꾸고 싶지만 바꾸는 데 실패한 바로 그 특성을 (다른 이름이 붙었을 때) 높이 평가했다.
보호는 자율성을 서서히 훼손한다. 그리고 다치지 않도록 노인들을 하루 종일 의자에 앉혀놓는 식으로 더욱 강압적으로 간섭하면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자발성마저도 사라진다.
예전에 자기가 스스로 하던 행동을 다른 사람이 해줄 때 우리는 이제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느낀다. 스스로 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요양원의 규칙 같은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노인에 대한 마인드 세트는 무능감을 기정 사실화한다.
노인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 세트를 가지고 있으면 좀 더 풍요로운 노년을 보낼 수도 있다. 어렸을 때 좀 더 낙관적인 노인의 이미지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노인이 되어서 더 기민하고 활달했다.
우리는 ‘노화로 인한 쇠퇴’ 중 실제로 유전자에 의해 계획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선입견에 기인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또 평온한 것이든 신나는 것이든 간에 우리가 그 가능성에 마음을 연다면 인생의 후반기에 얼마나 많은 선택이 가능할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많은 노인들이 너무 쇠약해서 아무런 일도 의무도 구실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노령 자체의 탓이 아니라 건강 탓이다.” 나이가 많은 것과 건강이 안 좋은 것은 늘 혼동되어 왔다. 노인에게 질병이 더 많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령과 질병이 같은 것은 아니다.
나이가 주는 한계선 밀어내기
우리는 노인들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정해진 노화의 과정을 목격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은 이러이러하게 늙어가게 되어 있다는 근거 없는 가정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구속하는 마인드 세트에서 벗어난다면 아마도 다가올 쇠락의 시간이 성장과 결실의 시간으로 바뀔 가능성이 훨씬 커질 것이다.
새로운 맥락, 새로운 에너지
피로와 소모 감을 경험하는 시점이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신체적 탈진은 많은 부분 선입견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에너지가 언제 다 떨어질지는 우리 자신이 가진 확고한 기대에 따라 정해진다.
새로운 맥락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현상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세컨드 윈드 second wind’ 현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예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마음 챙김이 생활화된 사람은 그런 현상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스스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종류가 다른 문서 업무들을 번갈아가며 한다든지 작업환경을 바꾼다든지 잠시 짬을 내어 조깅이나 전화를 하는 것이 모두 피로에 대한 마인드 세트를 떨쳐냄으로써 숨어 있는 에너지를 깨우는 방법이다(마음 챙김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는, 그 자체로 신나는 활동이다).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직원은 알아서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고, 마음 챙김이 몸에 밴 관리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