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웃렛에서 밀크티만 마시고 돌아온 이야기

내가 비스터 빌리지에서 얻은 것

by Charley

원래부터 쇼핑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의 쇼핑 철학은 매우 심플하다. "첫 번째로 들어간 가게에서 모든 것을 구입하고 나온다."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저기 수많은 샵을 둘러보며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찾는 일은 나에게 낯선 일인 동시에 별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일일이 시착까지 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악몽이다.) 그렇지만 모처럼 영국에 갔으니 친구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웃렛이라는 비스터 빌리지에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나는 쇼핑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꽤 괜찮은 쇼핑 어드바이저여서 쇼퍼의 부름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 비스터 빌리지는 영국의 옥스퍼드에 위치한 타운형 아웃렛으로, 다양한 패션 브랜드가 입점해 있어서 전 세계의 쇼퍼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다. 비스터 빌리지에 방문할 예정이라면 미리 신한카드, 하나카드, 현대카드 등의 카드사 사이트를 방문해서 vip 쿠폰의 qr 코드를 받아두자! 쇼핑 시에 추가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적용이 되는지 여부는 각 매장마다, 제품마다 다르기 때문에 매장 직원에게 물어봐야 한다.)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시계탑


시차 때문인지 아니면 아침잠이 없는 조합으로 여행을 왔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들처럼 새벽 여섯 시가 되자 동시에 기상한 나와 친구는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블룸스버리의 거리로 나왔다. 왜냐하면- 메릴본 역에서 비스터 빌리지로 떠나는 우리의 기차가 오전 8시 10분에 출발하는 차였기 때문이다. 이런 강행군을 펼치게 된 계기는 아웃렛이 개장하는 오전 9시에 맞춰서 비스터 빌리지 역에 도착하기 위함이었는데, 여유 있게 쇼핑하기 좋았던 아웃렛이 점심시간을 막 넘기자마자 온갖 사람들로 북적인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 매우 통찰력 있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계기야 어찌 되었든 아름다운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시계탑을 바라보며 런던의 이른 아침 공기를 마시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이었다. 전날 밤에 런던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마주한 오래된 런던의 건물이어서 인지 걷는 내내 시계탑에 눈길을 사로 잡혔다. 언젠가는 고성처럼 멋진 세인트 판크라스 르네상스 호텔에 묵어보리라는 기약 없는 다짐도 한 번 해 봤고 말이다.


피크타임이 해제되는 오전 8시 10분 이후에 출발하는 기차 티켓을 사면 조금 더 저렴하다.
우리나라와 별 다를 것 없는 플랫폼.


메릴본 역 안에 있는 카페에서 산 라테를 가지고 기차에 탑승했다. 좌석은 지정제가 아니어서 아무 자리에나 앉으면 됐고, 차량 내부는 그리 청결한 편은 아니었지만 꽤 안락했다. 비스터 빌리지까지는 약 50분 정도 걸리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방문하는 외갓집에 가는 기차에서 보던 바깥 풍경과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저가 없이 넓게 펼쳐진 들판을 보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거기서 풀을 뜯고 있는 젖소 무리도 한번 목격했으나 사진을 찍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방송에서 한국 기차를 탄 외국인이 창 밖에 소가 없는 것을 신기해하던 장면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 영국의 카페는 종이 빨대가 이미 정착된 것 같다. 내가 간 대부분의 카페에서 종이 빨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나 거기서나 나는 종이 빨대의 느낌이 너무 싫다. 마치 휴지 심으로 음료를 빨아 마시는 느낌 같달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빨대를 쓰지 않고 컵째로 들고 마시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애초에 환경을 생각한다면 종이 빨대도 주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동화 속 마을을 떠올릴 만큼 아기자기하게 조성된 비스터 빌리지


50여분 만에 도착한 비스터 빌리지는 막 오픈 시간을 지나서인지 매우 한산했다. 그리고 생각한 것만큼 크지도 않았다. 빌리지라고 해서 큰 마을 규모를 떠올렸건만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빠른 걸음으로 2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여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의류 브랜드가 모여있을 것 같은 광고 속의 이미지와도 매우 달랐고 말이다. 헌터가 있는데 닥터 마틴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든 설명이 안된다...! 비스터 빌리지에서의 쇼핑을 계획하고 있다면 미리 입점해 있는 브랜드를 검색해 보고 어느 곳에 들릴지 정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격은 일반 매장의 50~60% 정도 수준이지만 생각보다 건질만한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면 좋을 것 같다. 가장 오래 매장에 머물렀던 버버리를 기준으로, 아침 일찍 가서 물건이 많이 빠지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라인이나 인기 있는 라인들은 아예 입점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도 점심시간이 지나면 재고가 싹 빠지므로 될 수 있으면 오전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저렴한 맛에 마음에 드는 물건을 한번 찾아볼 생각으로 방문하는 것은 추천하지만 인기 라인의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냥 시내 백화점에서 구입하고 택스 리펀을 받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다. 특히 트렌치코트를 구입할 예정이라면 아웃렛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시착당한 뒤 내팽개쳐진 토즈들


물론 나라고 처음부터 쇼핑 어드바이저만 하다가 올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버버리에 괜찮은 지갑이나 겨울 코트가 있으면 구입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갑은 2~3년 전 리뷰에서나 봤던 것 같은 모델들이었는 데다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고, 패딩을 제외하면 겨울 코트(울 소재) 또한 몇 개 없었다. 취존의 영역이긴 하지만 버버리 패딩은 못생겼다. 그 가격에 사서 입기에는 훨씬 훌륭한 대체제가 너무나 많다.


거기다 가을에 닥터 마틴 부츠와 함께 하면 너무나 간지가 나겠군! 생각했던 바버의 왁스 재킷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손이 미끌 미끌해져서 금세 흥미를 잃었고, 심지어 비스터 빌리지의 바버 매장엔 레인부츠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 헌터 매장에 갔는데 아주 강렬한 색상들은 후하게 세일 중이었지만 무난하게 신을 수 있는 색상은 우리나라의 인터넷 쇼핑몰에서 할인쿠폰을 먹인 것에 비해 큰 차이가 없었다. 큰 차이가 없다면 국내에서 사는 게 낫지 않은가. 생고무로 만든 무거운 신발을 낑낑거리며 이고 지고 서울까지 가는 나의 인건비가 그보다 훨씬 비싸다. 닥터 마틴의 3홀짜리 로퍼도 하나 사고 싶었지만 닥터 마틴은 아웃렛에 입점조차 하지 않았고......


비스터 빌리지까지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오면서, 이번 아웃렛 쇼핑에서의 나의 롤은 쇼핑 어드바이저에 그치고 말았다.



비록 건진 것은 없었지만 동화 속 풍경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빌리지를 구경하는 것이 꽤 재미있는 일이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곳곳에 심어진 장미꽃들도 너무 아름다웠고 말이다. 다행히 나와는 다르게 친구는 이것저것 구입할 것들이 많았는지 꽤 의미 있는 쇼핑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한 명이라도 건진 것이 있으니 다행이다.



반나절 간의 쇼핑을 마치고 밀크티(w 타피오카)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참 기분 좋았다. 역시 뭔가를 먹기 전에는 운동을 해야 한다.



랄프로렌 매장에서는 전에 대구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영국인 점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대구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나의 말에 굉장히 놀라던 그녀의 유창한 "감사합니다."가 떠오른다. 영국에서 대구에 가 본 영국인을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이야. 이것 역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았다.

아주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도시라는 그녀의 설명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대구에 한 번 가 보고 싶어 졌다.




** 내가 아웃렛에서 건진 것 : 다음 여행지 정보. 다음 국내여행은 대구다!

** 몇 개월 전부터 즐겨 듣던 노래가 아웃렛의 매장에서 굉장히 자주 흘러나왔다. 나올 때마다 흥얼흥얼 따라 불렀는데 아마 미친 사람이나 술 취한 사람 같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Ten Tonnes의 Better Than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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