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거리 캠든과 런더너의 소울 파크 프림로즈 힐
나는 공원을 거니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운동을 할 때면 공원을 찾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도 가까운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지나가는 계절의 정취를 느끼고 싶을 때 역시 공원에 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곳에는 나로 하여금 평안과 안락을 느끼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 바람이 지나가며 나뭇잎과 가지들이 스치는 소리, 넓게 펼쳐진 푸른빛의 잔디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공원이라는 멋진 장소를 탄생시킨다.
그래서 나는 런던에 있는 공원들이 참으로 궁금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수도 없이 들여다본 런던의 지도에는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공원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가장 궁금하고 가 보고 싶었던 것은 다른 공원이지만, 이것 저것 여행지를 검색하다 우연히 맞닥뜨린 프림로즈 힐에서 내려다보는 런던 시가지와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의 사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런던에서 맞이하는 첫 저녁은 반드시 프림로즈 힐에서 보내겠다는 다짐을 한 나와 친구는 아울렛에 다녀와서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다.
원래는 프림로즈 힐에 올라 피크닉 매트를 깔고 맥주를 마실 계획이었지만, 나의 자그마한 실수 덕분에 계획이 무산되었다. 런던으로 출발하던 날 아침에 급하게 짐을 싸다가 피크닉 매트를 빼먹고 만 것. 그래서 캠든타운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마신 뒤 프림로즈 힐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일정을 약간 수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런던의 일몰 시간을 착각한 탓도 있다. (6월의 런던은 밤 10시가 되도록 해가 완전히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여행 일정을 조금 더 완벽하게 짤 수 있었을 텐데.)
러셀스퀘어에서 캠든은 버스를 타고 금방 갈 수 있고, 캠든에서 프림로즈 힐은 걸어서 10~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기에 딱 좋다.
영국 음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시 앤 칩스이기 때문에 영국에서의 제대로 된 첫 끼니는 피시 앤 칩스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바로 캠든에 위치한 Hook이다. 영국은 음식이 맛이 없기로 유명해서 피시 앤 칩스 조차도 한국에서 사 먹는 것이 훨씬 맛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식당을 고르는 데에 매우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Hook은 다른 곳과 달리 튀김옷이 바삭바삭하고(놀랍게도 눅눅한 피시 앤 칩스를 파는 가게가 많다고 한다.) 가게의 분위기도 깔끔한 데다 가격도 합리적인 편이어서 우리의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Classic Panko in Breadcrumbs(기본 피시 앤 칩스 메뉴)와 Fried Chicken in Panko Breadcrumbs,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메인 디쉬와 라거 두 캔을 시켰다. 메뉴 설명을 보면 치킨 메뉴에 제공되는 소스가 Korean BBQ sauce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나 싶은 영문 모를 맛이었다.
전반적인 음식에 대해 평을 해 보자면, 리뷰에서 본 대로 식감이 바삭바삭했고 생각만큼 느끼하지 않은 맛이었다. 다른 가게에서 파는 눅눅하고 두꺼운 튀김옷의 피시 앤 칩스를 먹어보지 못한 터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영국 음식의 악명에 덜덜 떨며 식당을 찾은 우리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물론 너무 맛있어서 꼭 다시 먹어 보고 싶은 정도는 아니지만, 적당한 가격에 실패 없는 피시 앤 칩스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할만하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는 데다 배가 매우 불렀기 때문에 캠든 거리를 조금 구경해 보기로 했다. 걷는 내내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홍대.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과 조잡한 듯하면서도 개성이 느껴지는 상점의 분위기가 홍대와 매우 흡사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는 것은 나와는 별로 맞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껏 캠든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90년대 밴드의 인터뷰에 캠든 스트릿이 굉장히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캠든에 있는 작은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고 나면 펍에 가서 술을 마시는 그 시절 밴드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나와 같은 펍에 있는 그들에 술을 한 잔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그렇지만 실제로 마주한 캠든은 상상과는 달리, 사람이 없고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와 별로 상성이 맞지 않았다. 하긴 내 성격에 펍에서 좋아하는 밴드를 만난다고 술을 살 수나 있을까. 역시 상상은 상상일 뿐이다.
마그넷이나 티셔츠, 키홀더 같은 기념품을 찾는 사람에게 캠든 록 마켓은 천국과도 같다. 잘 뒤져 보면 일반 기념품 샵보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나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일이므로 패스!
저녁을 먹었던 Hook이 있는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다가 우회전해서 10분 정도 걸으면 프림로즈 힐에 도착할 수 있다. 프림로즈 힐에 가는 길에는 바로 근처인 캠든과는 매우 다른, 조용하고 한적한 주택가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 실제로는 어떤 동네인지 모르겠지만, 겉보기에는 영화 <패딩턴>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브라운 가족이 살 것 같은 이미지여서 걷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언덕을 오르고 올라 프림로즈 힐의 꼭대기에 당도했다. 사진으로 볼 때는 꽤 완만해 보였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그보다는 가파른 느낌이었다. 단순히 운동 부족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피크닉 매트를 제대로 챙겼다면 아래의 잔디밭에 누웠을 텐데 그렇지 못했던 관계로 벤치에 앉았다. 기분은 훨씬 덜 났지만 아무것도 없이 맨 잔디밭에 철퍼덕 앉기에 나는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다. 낭만은 상상 속에서만 즐기는 것으로 하자.
프림로즈 힐에서 내려다보는 런던의 전경은 딱 나의 예상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 정도 언덕만 올라와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자세히 보면 런던아이, 더샤드, 세인트폴 대성당, BT 타워, 스카이가든이 있는 워키토키 빌딩 등 런던의 랜드 마크들을 모조리 찾아볼 수 있다.) 서울에는 산이 있으면 있지 이런 류의 언덕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색달랐게 아닐까 싶다.
프림로즈 힐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은 매우 평화로웠다. 대부분의 강아지들은 목줄 없이 뛰어다녔고(목줄 착용이 의무가 아니다.), 런던의 젊은 친구들은 잔디밭에 둘러앉아 Kanye West의 Power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고 있었다. 써놓고 보니 사진에 보이는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선곡인 것 같지만, 당시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도취되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즐겁게 일상을 보내는 그들의 모습이 매우 즐거워 보여서 오히려 약간 부럽기까지 했다. 여행자의 패기로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를 것을 그랬나, 어차피 다시 안 볼 사람들 인걸.
이 곳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해가 슬슬 떨어지려는 찰나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런던 사람은 욕할 수 있지만 외지인은 안 되는, 바로 그 런던의 변덕스러운 날씨인가 싶어서 내리는 비를 맞는 것도 재미있었다. 지금에 와서 사진을 보니, 비가 온다고 자리를 파하고 내려가는 사람들은 거의 외국인인 것 같다. 진짜 런더너는 이 정도의 약한 비에는 꿈쩍하지 않는가 보다.
생각해 보면 프림로즈 힐의 런더너를 보며 부러웠던 점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평범한 목요일 저녁에 공원에 보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일상 그 자체였다. 이 사람들이라고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동네라고 근처에 공원이 없는 것이 아닌데 나의 평일은 왜 그렇게 치열하고 피곤한 것일까 싶어서 약간 슬픈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일상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오지 않는 이상 삶에서 여유를 찾을 수 없는데, 이들은 어떻게 밸런스를 유지하며 사는 것일까. 구름이 잔뜩 낀 런던의 하늘을 바라보며 아무리 사색해 보아도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쓸데없는 일에 허비하는 시간을 조금 덜어내고 심신의 안정을 취하기 위한 시간을 조금 더 가져보자는 나만의 다짐을 하고 프림로즈 힐을 내려왔다.
I have conversed with the spiritual sun.I saw him on Primrose Hill.
- William Blake -
프림로즈 힐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위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나는 프림로즈 힐을 런더너들의 소울 파크(Soul Park)라고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일상에서 지친 하루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나만의 소울 파크를 하나 정했다. 내 일상이 지금보다 더 균형 있고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