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심심했던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
6월을 기준으로 매주 월, 수, 금, 일요일에만 진행된다는 버킹엄의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나갈 채비를 했다. 미리 알아봐 둔 블룸스버리의 The Espresso Room이라는 카페에서 간단하게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기도 했고, 버킹엄에서 그나마 괜찮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교대식이 시작되는 11시보다 적어도 1~2시간은 일찍 가서 기다려야 한다는 리뷰를 보았기 때문이다.
*Changing of the Guard 사이트에서 미리 교대식의 일정과 시간을 확인해 보면 도움이 된다.
The Espresso Room은 블룸스버리 주택가에 위치한 매우 작은 카페로 오전 7시면 오픈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을 먹기 딱 좋은 곳이다. 종류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갓 구운 신선한 빵을 구입할 수 있고 커피도 꽤 괜찮다.
*런던 내에 다른 지점이 세 군데 정도 더 있는 것 같지만(홀번역, 코벤트가든 등), 평범한 프랜차이즈 카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다른 지점보다 블룸스버리점의 아기자기한 외관이 더 마음에 든다.
*현금 결제가 안 되는 가게이므로 해외 결제가 가능한 신용카드가 필수이다.
들어가자마자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베이컨 에그 크루아상과 따뜻한 플랫화이트를 하나 주문해서 카페 밖에 비치된 초록색 테이블에 앉았다. 바로 코 앞의 거리를 빠르게 지나다니는 출근길의 런던 사람들을 가만히 구경하며 한 모금씩 들이키는 커피는 어쩌면 그렇게 부드럽고 향긋하던지. 서울에서의 나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간과 여유이기 때문일까. 8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쾌한 공기와 느긋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아침 식사도 했으니 오늘의 첫 목적지인 버킹엄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블룸스버리에서 버킹엄 궁전까지 가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버스를 탈 수도 있고 버킹엄과 가까운 그린파크 역이나 세인트 제임스 파크 역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런던의 상쾌한 아침 공기를 느끼며 조금 걷고 싶었던 우리는 채링크로스 역에서 내려 대로(지도에 보이는 더 몰 로드)를 따라 쭉 걸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가는 길에 트라팔가 광장과 애드미럴티 아치도 구경할 수 있는 꽤 괜찮은 루트인데 가는 길도 매우 쉽고, 천천히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간단히 아침을 먹고 걷기에 알맞아서 추천하고 싶다.
런던의 날씨가 우중충하다는 것은 단지 편견에 불과했던 것인지 이 날은 이른 아침 부터 화창한 하늘위에 눈부신 햇살이 반짝였다. 그래일까, 푸릇푸릇하게 자라난 잔디와 나무를 구경하며 걷는 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중간에 우리를 마중 나온 귀여운 청설모 친구와도 마주쳤고 말이다. 어디로 보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산책 시간이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음 날 트라팔가 광장에서 WEST END LIVE 2019 행사가 있는 덕분에 펜스가 설치되어서 트라팔가 광장의 상징인 사자 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넬슨 제독 기념비는 제대로 보였으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매년 트라팔가 광장에서 개최되는 WEST END LIVE는 웨스트엔드에서 상영하는 뮤지컬의 인기 넘버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런던의 음악/뮤지컬 축제이다. 웨스트민스터 시의회와 런던 연극협회가 주관하는 행사여서인지 입장료가 무료이므로 미리 일정을 알아보고 여행 계획에 추가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올해만 해도 라이온 킹, 오페라의 유령, 위키드, 맘마미아, 레미제라블 등의 인기 뮤지컬 넘버들이 공연되었다.)
그렇게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 덕분에 즐거운 마음으로 들떠서 버킹엄에 도착했건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좋은 자리는 이미 먼저 도착한 수 많은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던 것. 그나마 한 시간 반이라도 일찍 도착한 덕분에 상대적으로 고지대인 빅토리아 메모리얼 쪽에 자리를 잡아서 최소한의 시야는 확보되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다른 사람들의 정수리만 실컷 구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이 날 영국을 찾은 관광객은 여기에 다 모여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대단한 인파였다. 관광 도시로서의 런던이 보여주는 진 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여기서 한 가지 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한 시간 반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치"라는 중요한 요소를 간과한 우리는 실제로 근위병이 진입하는 더 몰 스트릿을 완전히 등지고 있는 바람에 근위병의 행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세인트 제임스 궁을 나선 근위병은 더 몰 로드를 따라 버킹엄 궁전 방면으로 진입한 후, 세인트 제임스 파크 쪽 스퍼 로드 방형으로 꺾어서 궁전 안으로 들어가서 교대식을 진행하는데 나와 친구는 컨스티츄션 힐 방향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더랬다. 그러니 아무것도 안 보일 수밖에. 군악대의 소리가 들려온 이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뛰어 내려갔지만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근위병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이거야 말로 오랜 기다림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버킹엄에서 정말 아무것도 못봤다면 이번 여행에서의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을텐데, 다행이 우리가 바라보던 방향으로 호스 가드로 향하는 기마병의 행렬이 지나가는 바람에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길 수 있었다. 자기 위로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일반 근위병 보다 기마병이 훨씬 근사하긴 하다. (저 멋진 금빛 투구와 빨간 망토를 좀 보라!) 남들과 다른 방향을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멋진 기마대의 영상을 제대로 찍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위치 선정을 잘못한 것이 꼭 나쁜 일 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애초에 여행을 계획할 때 사람이 많은 버킹엄 보다는 호스 가드의 기마병 교대식을 볼까하고 고민했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적어도 염두에 뒀던 걸 보았으니 아주 악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에 와서 사진을 다시 꺼내 보니 빅토리아 메모리얼은 물론이고 버킹엄 궁전의 건물과 주변의 전경이 참 아름다웠다는 감상이 들지만, 저 당시에는 와글와글한 사람들 틈에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근위병 교대식이 없는 날 궁전 건물과 온갖 기념상 등을 찬찬히 살펴보았으면 훨씬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제대로 보지 못하긴 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근위병 교대식이 근사하지 않았고, 그다지 뚜렷한 인상을 받지 못한 터라 일정에서 빼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안 봤으면 또 그 나름대로 후회가 남았으려나?
문득 어느 순간부터 서양적인 것이 현대적인 것 그 자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인지 한국에서 나고자란 나에게조차 광화문의 수문장 교대식이 버킹엄의 근위병 교대식 보다 더 독특하고 신비로운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마뜩찮다.
** 버킹엄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전에 알아야 할 3계명
1.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에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음으로 먼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2. 근위병 교대식을 제대로 볼 생각이라면 미리 홈페이지에서 스케줄을 확인하고, 어느 곳에서 대기할 것인지 지도를 보며 생각해보고 적어도 2시간 정도는 일찍 가서 대기하도록 하자.
3.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위의 항목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은 호스 가드의 기마병 교대식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말똥만 주의하면 훨씬 덜 복잡하고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