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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성 Aug 06. 2020

'어른'과 '꼰대'

로어칸 피네건, <비바리움> (1)

*영화 <비바리움>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친구와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꼰대의 모습들을 정리한 결과, 우리는 꼰대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고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소위 ‘라떼’를 좋아하시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함의 잣대를 타인에게 곧잘 들이밀곤 하시는 전형적인 ‘꼰대’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정의였다. 물론 꼰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해서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최소한 우리는 그런 꼰대들과 달라야 했기에 두 사람은 꼰대들을 ‘그런가 보다’하고 넘기기로 했고, 꼰대가 되지 않기로 다짐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여자 아이는 새끼 뻐꾸기에 의해서 둥지 밖으로 밀려난 아기 새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아이는 이것이 뻐꾸기의 소행임을 알게 되자 뻐꾸기는 왜 아기 새를 죽였는지 알고자 한다. ‘왜요?’라는 어린아이의 질문을 받은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러하듯, 젬마의 대답은 순수함과 진실 사이를 오가면서 아이의 동심을 보호한다. 그러나 ‘가끔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란다.’라는 대답은 아기 새가 죽은 이유를 궁금해 하는 아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실상 아이를 위로해야 하는 어른이라고 해서 왜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번식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어른 역시도 슬퍼하는 아이만큼이나 그것이 궁금하지만, 어른은 질문을 늘어놓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더 익숙하다. 아이가 떠난 뒤 젬마와 톰은 뻐꾸기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새를 땅에 묻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는 뻐꾸기가 살아가는 방식이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바꿀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기 새의 죽음을 둘러싼 아이와 어른의 차이로 짐작하건대,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경험은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들을 구분하게 만든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은 그것을 경험한 뒤라는 것이다.


 신혼부부인 젬마와 톰은 결혼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집값이 오르고 있으니 서둘러 집을 구해야 한다는 학부모의 조언은 젬마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아기 새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그것이 뻐꾸기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처럼, 젬마는 이 사실이 감당하기 버겁다. 젬마는 뻐꾸기에 대해 질문하던 아이처럼 ‘집값은 왜 오르는 것인가요?’라고 따져 묻고 싶지만 대신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른인 젬마는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란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새롭게 살아갈 집을 찾는 신혼부부의 삶에 자연스레 뻐꾸기를 등장시킨다. 카메라에 등을 돌린 채 젬마와 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마틴은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틴은 부동산 중개인이라는 이유로 젬마와 톰의 의심을 사지 않는다. 두 사람이 집을 구해본 적 없다는 사실은 마틴을 대하는 어색한 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젬마와 톰은 마틴의 제안이 내키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따른다. 두 사람은 어른이지만, 결혼생활에 있어서는 아이와도 같기 때문에 그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결혼생활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측하거나 미리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욘더에 둥지를 튼 젬마와 톰의 삶은 새롭게 주어진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욘더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두 사람은 욘더에 머물게 되며, 아기를 키워야 풀려날 수 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어찌할 수 없이 아이를 키운다. 톰이 끊임없이 땅을 파내려가는 것은 이것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미 능동성을 박탈당한 두 사람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톰이 파헤쳐놓은 땅을 밤새 원래대로 되돌려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욘더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마저 예상하고 이용하는 설계자의 전지전능함은, 어떠한 행위도 허락되지 않은 젬마와 톰의 무력함과 대비를 이룰 뿐만 아니라 공포감까지도 유발한다.


 <비바리움>에서 가장 큰 무력감과 공포를 안기는 순간은 젬마와 톰이 끝내 자신들이 뻐꾸기에 의해 이용당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젬마는 영화 초반 둥지에서 밀려나 바닥에 떨어진 아기 새가 되어, 아기를 키우면 풀려날 수 있다는 그들의 말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젬마는 마틴을 따라 들어간 초현실적인 공간에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최후를 목격한다. 젬마는 초현실적 공간에서의 짧은 경험을 통해 욘더의 실체를 보고 난 뒤에야, 욘더에서 탈출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젬마와 톰은 설계자에게 뻐꾸기가 살아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두 사람의 손에 자라난 아이는 젬마에게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어른이 된다고 하여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일을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지’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잔혹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아기 새의 둥지를 덮친 것을 보며, 젬마는 모든 것을 이해한 듯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욘더에 갇힌 젬마는 자신이 마틴을 기른 엄마라는 사실과, 욘더가 자신의 집이 되었다는 사실마저도 부정하기에 이른다. 마틴의 눈에는 젬마가 ‘꼰대’로 느껴졌을 것이다. 마틴은 주어진 상황을 ‘그런가 보다’하며 넘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욘더 바깥의 삶을 이야기하는 젬마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는다. 마틴은 젬마의 넋두리에 ‘그러든지 말든지’로 대꾸할 뿐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젬마는 완전한 꼰대로 거듭나 있었다.


 마틴이 젬마의 시체가 담긴 가방을 던져넣은 구덩이에는 수많은 꼰대들이 묻혀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젬마와 톰처럼 원치 않게 꼰대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극중 지옥으로 묘사된 욘더에 들어가 두 사람의 시체를 거둬들여 ‘두 사람은 꼰대가 아니다’라고 증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젬마와 톰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꼰대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비바리움>을 보고 난 뒤에도 여전하지만, 꼰대 소리를 듣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친구와 고민하지 않은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된다.


사진 - 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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