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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성 Jul 18. 2020

죽음의 오디세이

영화 <부력> (로드 라스젠, 2019) 리뷰

Dreams Come True

 <부력>은 믿기 힘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영화다. 태국에서 한 달 만에 큰돈을 벌어왔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로 시작하는 영화는 관객들을 점차 비현실의 영역으로 이끌어간다. 차크라가 ‘공장’으로 향하는 오토바이 위에서 속도를 느끼는 짧은 순간은 인물들이 비현실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린다. 차크라의 행위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현실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차크라와 관객의 상상을 벗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사람이 수십의 사람들을 트렁크에 포개서 데려가고, 그렇게 보내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배에 올라 일을 시작한다. 도무지 현실이라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 차크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차라리 꿈이길 바라는 현실은 차크라에게 꿈을 꿀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차크라의 비현실이 현실로 변해가는 과정은, 그에게 바다가 죽음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동시에 발생한다. 죽고 나서야 빠져나갈 수 있는 바다에서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물고기들이다. 그리고 그 물고기들을 잡는 인간 역시 죽음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화의 역설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배에 올랐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그들에게 돈을 벌어다 주고 삶을 주어야 함에도 바다는 생명의 이미지와 연결되지 않는다. 배에 오르기 전 바다와 삶을 연결하던 사람들은 배에 오른 뒤 죽음만을 떠올릴 뿐이다. 따라서 차크라가 오른 배는 바다를 죽음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공장이다.


 배를 살아서 빠져나간 물고기는 차크라가 놓아준 바닷게 한 마리가 전부였다. 배를 탈출해 헤엄치는 바닷게의 이미지는 차크라에게 아직 삶의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이를 이어진 시퀀스에서 곧바로 물고기를 잡는 장면과 연결하면서, 차크라가 놓아준 바닷게가 다시 잡힐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배에서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이 이내 발각되어 다시 배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바닷게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차크라의 처지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아서, 그의 생명은 선장의 손에 달려있고 배에서 내린 뒤에도 언제든 다시 배에 오르게 될 수 있었다. 가난에서 탈출할 기약이 없다는 이유로 배에 오른 차크라는, 죽음의 배를 경험하면서 그 ‘기약 없음’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바다가 익명성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 역시 차크라의 비현실이 현실로 변해가는 과정과 일치한다. 무엇에 쓰는지도 모르는 물고기들을 잡는 이름 없는 사람들은, 소설 속에서 전설의 향유고래를 잡기 위해 떠났던 에이해브와 피쿼드 호의 선원들과 달랐다. 돈을 벌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자신의 목표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차크라는 현실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차크라의 흔적이 옅어질수록 그가 배에서 탈출할 가능성 역시 줄어들었다. 차크라가 믿고 따르던 존재가 죽음을 맞이한 뒤 배에서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떠나온 고향에서도 자신의 존재는 지워져가고 있었다.


모순에서 벗어나기

 차크라가 선장에게 ‘넌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차크라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던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영원히 가난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이유로 떠나온 고향은, 알 수 없는 바다 위에서 차크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나은 삶이라는 이상을 품고 오른 배가 떠나온 현실과 다르지 않다면, 차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처음 고향을 떠나온 것처럼 다시 그곳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차크라의 목표는 고향을 떠나 금전적으로 더 나은 삶을 누리겠다는 것에서, 배를 떠나 인간성을 누리겠다는 것으로 변해있었다.


 차크라가 배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은 차크라의 현실이 지옥과도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차크라가 선원들과 선장을 죽임으로써 완성되는 지옥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되갚는 곳이다. 이는 차크라가 캄보디아 노동자들과의 갈등을 살인을 통해 매듭지었다는 사실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영화는 배가 폭력으로 얼룩져 지옥으로 변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차크라가 그물에서 찾는 물건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차크라가 그물 속에서 찾는 물건들은 갈등을 유발하는 소재일 뿐만 아니라 갈등을 매듭짓는 소재라는 점에서 폭력과 연결된다. 차크라가 선장과 선원들을 모두 죽인 뒤에도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폭력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이 그들을 죽이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지옥은 인간성을 누리기 위해 인간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모순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노예로 잡혀온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는 모순 속에서 죽어갔다. 또한 모순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죽음마저 모순적이어서, 죽어 물 위로 떠올라야 할 사람들은 선장의 손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차크라의 목표가 생존으로 귀결되는 것은 죽음을 비롯한 삶의 모든 요소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모순이 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차크라의 손에 목숨을 잃은 선장의 몸이 바다에 떠오르는 것을 보며 차크라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모순의 굴레를 벗는다.


 차크라에게 그 모든 일들을 경험하며 배운 점이 있다면 자신을 옭아매는 모순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집 앞에 멈춰선 차크라는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모순을 마주한다. 차크라가 집을 떠난 이유는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옥을 경험했던 차크라는 집을 보고 모순을 먼저 떠올리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마음속에서는 집에 대한 그리움보다 모순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했다. 14살의 소년 차크라는 그렇게 모순으로부터 뒷걸음질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순을 알게 된 소년은 집을 두려워하고, 평생 모순으로부터 도망치게 되었다.


 착취는 희생자가 되어 죽어간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옥에서 살아나온 사람들까지도 피해자로 만든다. <부력>이 소년의 생환담으로 끝을 맺음에도 어두운 분위기를 벗지 못하는 이유다. 관객은 물속에서 떠오른 차크라의 머리를 보고 그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지만, 물속에 여전히 차크라의 발목을 잡을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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