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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성 Jan 27. 2021

신림과 설입 사이

봉천동에 대한 감상

 봉천동에서 나고 자라면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이후에야, 봉천동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봉천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뜸 봉천이 어디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봉천을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사는 곳이라고만 여겼던 동네는 남에게 소개할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봉천보다 유명한 지역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마침 신림과 서울대입구는 봉천의 양 옆에 위치하고 있었고, 봉천을 모르더라도 신림과 서울대입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봉천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봉천을 설명해야 할 때면 언제나 ‘신림과 설입(서울대입구) 사이’로 봉천을 설명해왔다.

 문득 내가 봉천을 설명하는 방식이 봉천에서 태어나서 나고 자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봉천이 신림과 서울대입구 사이에 있다는 말은 소개라기보다 사실을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봉천을 가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봉천은 신림과 서울대입구 사이에 있는 동네다.’라고 설명할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어디에 사는지 설명하기에는 충분했지만 내가 사는 곳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묘사였다. 그래서 신림과 설입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 일상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실제로 생활을 돌아보면 신림과 서울대입구 사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신림부터 서울대입구까지는 모두 같은 행정구역으로 분류되어 있고 생활하면서도 전혀 먼 거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나 봉천에 사는 사람의 생활반경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의 생활반경과 분명히 달랐다. 무엇보다 봉천에 사는 사람은 큰 동네를 양옆에 끼고 있다는 이유로 애매한 거리에 있는 신림과 서울대입구를 오가야만 했다. 봉천동에 사는 사람에게 외출은 신림이나 서울대입구에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봉천동에 대한 소개에 신림과 서울대입구가 등장하는 이유도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봉천동에 사는 것은 걷는 행위와 분리될 수 없었다. 봉천동에 대한 기억은 신림과 서울대입구를 오가며 본 것, 느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공간이자 가장 잘 아는 공간인 봉천동을 소개하는 최고의 방법도 길 위에서 느낀 점을 나누는 것이었다.


어딜 가기 좋은 동네

 신림과 서울대입구에는 있지만 봉천에는 없는 것은? 대표적으로 영화관, 스타벅스, 쇼핑몰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신림과 서울대입구를 오갈 때면 이따금씩 리스트에 식당이나 가게가 추가되기도 한다. 봉천에서 신림(서울대입구)는 오가기에 불편한 거리는 아니지만, 집 근처에 점포가 새로 들어설 때마다 리스트가 줄어들기를 바란다. 특히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봉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봉천에 사는 사람이 집 근처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많은 사항을 결정해야 한다. 신림(서울대입구)에서 영화를 볼 것인지, 밥은 어디에서 먹을 것인지, 오고갈 때 걸어갈 것인지 등 하나같이 사소한 결정들이지만 봉천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 보고 싶은 영화가 많이 개봉할 때면 신림과 서울대입구에 같은 기업의 영화관이 입점해있다는 사실이 정말 고마워진다.

 영화관을 갈 때에도, 커피를 사러 갈 때에도 신림이나 서울대입구를 다니다 보니, 매일 걸어 다녀야 한다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합리화하게 되었다. - ‘봉천은 신림과 설입 사이에 있어서 어디든 다녀오기 좋다.’ 봉천에서 신림(서울대입구)까지 가는 길이 애매하게 먼 거리로 느껴진다면 굳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볼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집을 나서게 해주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디에 가기 좋다’는 특성은 신림과 서울대입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주어지지만, 매일같이 발품을 팔던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소중한 장점처럼 느껴지게 된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봉천의 장점으로 ‘어딜 가기 좋다’는 사실을 언급하곤 한다. 흔히 신림(서울대입구)에서 봉천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신림과 설입 사이’라는 애매함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밌게 느껴진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들 마찬가지로 봉천에 살고 있으니 어딜 가기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길을 걸으며 각자가 품고 있던 몇 가지의 불만을 이야기하다보면 어느덧 봉천에 다다르고 다시 집을 생각하게 된다. 봉천과 신림(서울대입구) 사이의 거리는 불만이 길어지는 것을 막기에 최적의 거리다. 신림과 서울대입구를 매일같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네의 자랑거리를 동네 안이 아니라 동네를 벗어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신림과 서울대입구를 걸어서 오가는 것이 싫지만은 않다. 특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입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여유를 선사해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집으로 돌아올 때 걸으며 이러저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즐기고, 가끔 친구와 봉천역 쪽으로 걸으며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곤 한다. 어떻게 보면 봉천을 ‘신림과 설입 사이’로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림과 서울대입구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기 때문이다. ‘신림과 설입 사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소개처럼 보이지만, 애매하게 멀리 떨어진 거리를 매일 다니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감각이기도 하다. 어쩌면 ‘신림과 설입 사이’는 봉천을 소개하는 가장 솔직하고 진솔한 표현이 아닐까.

     

봉천만이 줄 수 있는 것

 사람들로 가득찬 신림과 서울대입구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봉천동이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신림과 서울대입구에서 훨씬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더 많은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봉천은 신림과 서울대입구의 사이에서 눈에 띄는 동네가 아니다. 신림에서 버스를 타고 봉천을 지나갈 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건물들의 높이가 낮아졌다는 사실뿐이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굳이 봉천에 들리지 않고도 신림과 서울대입구를 오갈 수 있기 때문에, 봉천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봉천에 내려 동네를 둘러볼 일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지나치기 쉬운 동네인 봉천은 결국 걸어야 만날 수 있는 동네다. 그리고 길을 걸어 다닐 때 더욱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동네다.

 봉천에서 서울대입구 방향으로 걷다보면 작은 시장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시장이 봉천동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시장이 있는 골목은 전통시장과 샤로수길을 합쳐놓은 것만 같아서 시장을 지나 서울대입구로 향하면 거리의 분위기가 점차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길이 시작하는 초등학교 주변에는 분식집과 피자가게가 있고, 중간에 위치한 시장은 옛날 시장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서울대입구 근처에 이르면 샤로수길에서 만날 것 같은 가게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옛날 시장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골목은 ‘이대로 가면 서울대입구가 나올까’ 싶은 의심을 품게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전통시장과 어울리지 않는 가게들이 채소가게나 반찬가게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면 서울대입구에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작은 골목에서 다채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그 골목을 오가면서도 질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시장 골목을 걷고 있으면 그 짧은 길을 마음대로 정의하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분위기를 바꿔놓는 기분이 든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시장 근처의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골목을 찾는다. 또한 그 골목은 시장인 동시에 봉천과 서울대입구를 잇는 길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통시장보다 넓은 골목을 따라 점포들이 늘어서 있다. 장을 보러 오지 않은 사람도 넓은 골목을 따라 시장을 구경하며 여러 풍경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서울대입구에서 찾아가기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찾는 골목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과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는 대학생들이 한 맥주집 안에 섞여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서울대입구에 위치한 맥줏집의 분위기가 어떠한가를 생각해보면 봉천의 맥줏집은 정의하기 힘든 느낌을 준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서울대입구역 주변 상점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이제는 시장에도 대학가에 있을 법한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다. 새롭게 생기는 가게들을 보고 있으면 봉천 또한 여느 대학가처럼 변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전통시장과 시장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한 세대가 같은 거리를 거니는 모습은 분명 이채롭지만,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장을 이용하고 맥주를 마시는 다양한 사람들은 단지 봉천과 서울대입구 사이를 걸어서 오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섞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도 봉천동에서 시장골목과 함께 자라온 만큼 골목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어렸을 때는 그 골목을 단순히 시장으로만 생각했지만, 새로운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골목의 모습이 변했다는 사실은 나 역시도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초등학교가 끝나고 떡볶이를 사먹던 골목에서 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게 된 것이다. 다양한 이유로 찾았던 골목은 언제나 내가 있을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래서 골목을 걷고 있으면 언제 이 골목을 다시 찾더라도 내가 머물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시장 골목은 그래서인지 더 걷고 싶어지는 골목이다.

 봉천은 언제나 다른 이유로 나를 걷게 하는 동네다. 그동안 학교를 가기 위해, 영화를 보기 위해, 집에 돌아오기 위해 길을 걸었다. 그래서 신림과 설입 사이는 일상의 궤적과도 같았다. 앞으로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봉천에서 자라며 배운 것이 있다면 봉천에 사는 이상 걷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걷는 것이 익숙해진 지금은 조금 덜 걷기보다, 길을 걸으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한다.


*본 글은 유엘씨(Https://ulcpress.com)에도 기고되었습니다. 

https://ulcpress.com/forum/view/45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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