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엘라>, <블랙 위도우>, <피닉스>
1. <크루엘라>, 크레이그 길레스피
길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이상한 길로 돌아가는 택시에 탄 기분이 든다. 택시 기사가 엠마 스톤이기에 택시비는 아깝지 않았지만, 승객을 목적지에 내려주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른 것처럼 이야기하던 기사는 돌연 택시를 길가에 세운다. “여기서 <101마리 달마시안> 타고 가면 그게 제일 빨라요.”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리라 믿고 지루한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건만, 다시 가야 할 길을 일러주니 승객으로서는 당황스럽다. 어쩐지 택시 기사가 옷에 대해 과할 정도로 이야기를 한다 싶었다.
성장 서사 – 목걸이 찾기 – 남작에 대한 복수 – 정체성 확립으로 이어지는 긴 서사의 핵심은 크루엘라의 정체성에 있다. <크루엘라>의 이야기가 <101마리 달마시안>과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연결고리를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크루엘라>의 서사는 크루엘라의 면모를 설명하기에 부족한 점을 갖추고 있다. 목걸이 찾기는 순전히 서사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가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목걸이 탈취 시퀀스나 패션쇼 시퀀스도 엠마 스톤이 입고 있는 옷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가 정해진 길을 빙빙 돌아간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관객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다니던 크루엘라는 관객이 내리는 순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루엘라는 광장에서 새삼스럽게 “남작 부인이 엄마일 리가 없다”며 현실을 부정한다. 이는 생모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부정인가? 그렇다면 크루엘라는 자신이 계획한 복수 자체에 대해 고민했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됐든 복수를 끝마친다는 점에서 크루엘라는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지 않았다. 결국 크루엘라는 자신이 남작 부인과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으나 같은 핏줄이라는 점에 좌절하고 있다. 크루엘라가 자신의 핏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성장 서사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복선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군다나 출생의 비밀은 크루엘라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다. 관객들은 호레이스나 재스퍼의 이야기를 통해 크루엘라와 남작 부인이 닮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작 부인 역시 크루엘라가 자신의 딸임을 알고 있었다. 광장에서의 크루엘라는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데 그걸 자기만 모른다’라는 설정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크루엘라로서 쾌감을 만끽했는데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을 것만 같다’라는 말은 더욱 뻔뻔스레 느껴진다. <101마리 달마시안>에 등장하는 크루엘라의 면모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뻔뻔함을 부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크루엘라>만의 서사를 기대하며 영화를 본 입장에서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2. <블랙 위도우>, 케이트 쇼트랜드
<블랙 위도우>를 관통하는 유사 가족과 연대라는 키워드는 한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블랙 위도우>는 주인공 나타샤를 통해 유사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주인공의 동생 옐레나를 통해 인물들 사이의 연대를 이야기한다. 옐레나는 블랙 위도우의 일원이자 유사 가족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서사의 중심에 위치해 극을 이끌어나간다. 스칼렛 요한슨이 이 작품을 끝으로 MCU에서 하차하는 것이 예정된 상황에서 제작진은 합당한 결정을 내렸다.
자칫하면 서사 전체의 유기성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 MCU에 데뷔한 플로렌스 퓨는 두 가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리틀 드러머 걸>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는 스파이 액션은 <블랙 위도우>에서 한층 화려해졌다. 스칼렛 요한슨과 함께하는 액션신도 좋은 호흡으로 소화해냈다. 사실 탄탄한 기반을 다져온 MCU의 액션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큰 쓸모가 없다. 또한 옐레나는 가족 안에서 막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애정을 받고 싶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인물에서 성숙을 이뤄내는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언니의 자세를 따라 해보는 장면에서 미워할 수 없는 막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언급된 두 명의 주인공 이외에도 데이비드 하버와 레이첼 바이즈는 돋보여야 할 순간에만 돋보이는 흘륭한 조연으로 역할을 다한다.
다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히어로들 사이의 연대는 타당성을 지니지만, <블랙 위도우>는 나아가 여성들의 연대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다른 히어로 영화들은 악당에게 구별되는 특징을 부여하거나 서사를 부여해 상대가 누구인지 분명히 밝힌다. <블랙 위도우>에서 연대가 필요한 까닭은 레드룸에 대한 묘사처럼 보이지 않는 적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이는 기존 히어로 영화의 공식과 충돌하는 지점이다.
여성들이 자유로운 선택을 내리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빌런을 찾아 나선다는 <블랙 위도우>의 서사는 정작 연대의 필요성을 의문에 부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제작진은 빌런의 힘을 약화시키고 히어로의 주체적인 결정을 부각한다. 그럼에도 전체 서사에서 연대로 인해 가능했던 일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블랙 위도우의 면모만 부각될 뿐이다. 블랙 위도우를 잡기 위한 연대가 주체적인 연대로 변화했다는 표면적인 변화만을 찾을 수 있다. 어벤져스가 해체된 시점에서 그들은 무엇을 위해 연대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할 수는 없다. 블랙 위도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으로서는 손색이 없었지만, MCU가 원하는 방향성을 확인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3. <피닉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넬리와 거리의 악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악사의 연주를 듣기 위해 서있던 것처럼 보이는 넬리는 악사에게 돈을 지불하고 조니의 행방을 묻는다. 그리고 악사의 대답을 듣자마자 넬리는 자리를 뜨고 악사는 그 자리에 남아 연주를 계속한다. 악사는 그 전에도 같은 방식으로 연주했을 것이고, 그 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악사는 자신이 연주를 통해 돈을 번다고 믿지만 그 기대는 현실과 어긋나있다.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통해 누군가의 행방을 묻거나 필요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피닉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기대를 품고 있지만 그들의 기대 역시 모두 어긋나있다. 어긋난 기대는 끊임없이 현실과 불협화음을 일으키지만 영화는 어긋난 단면을 계단삼아 끊임없이 나아간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조니와 넬리는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내놓는다. 조니는 과거를 현재에 불러냄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 믿는다. 반면 넬리는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홀로코스트 이전의 넬리를 필요로 하는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지니고 있기에 서로 끌린다.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기에 계속해서 어긋난다.
두 사람이 실패하게 된 까닭은 한 가지로 설명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과거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물리적 제약에 부딪힌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넬리에게 홀로코스트는 되돌릴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개인적 차원의 기억을 넘어서는 홀로코스트는 넬리가 시간을 되돌린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모순을 발생시킨다. 한편 조니는 기억의 변양으로 인해 좌절한다. 달라진 얼굴을 한 넬리는 그녀의 현재 모습인 동시에 조니의 기억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영화가 넬리의 입을 통해 실패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인상 깊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넬리가 품은 권총은 두 사람의 미래가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영화 말미 두 사람의 포옹은 당장이라도 영화를 끝맺을 듯 위태로워 보인다. 두 사람의 계획은 철저한 실패로 끝이 나지만, 넬리의 노래는 두 사람의 실패를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그러나 넬리의 노래는 조력자의 자살만큼이나 냉정하고 차갑다. 조니는 과거에 자리한 기억 속의 노래가 현재에 똑같이 들려오는 것으로 과거를 기억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