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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성 Apr 10. 2020

그의 뒷모습

조엘 코엔&이단 코엔, <인사이드 르윈> (2013)

 르윈은 언제나 카메라를 마주본다. 르윈이 종종 공연하는 가스등 카페에서 다른 가수들이 공연할 때, 카메라는 그들이 누구인지 잠시 들여다 볼 뿐 이내 르윈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심지어 르윈이 문밖으로 도망친 고양이를 쫓을 때에도 카메라는 르윈의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집요하리만큼 르윈의 표정과 반응을 살피는 카메라의 관심이 무색하게도, 르윈은 이렇다 할 성취가 없는 무명 가수다.


 르윈은 늘 무언가를 좇는 존재다. 그는 언제나 가수로서의 성공을 좇으며, 노래를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돈을 벌 기회를 찾아 다닌다. 심지어 교수님이 기르는 고양이마저 좇아야 하는 르윈은 쉴 틈이 없다. 르윈이 향하는 모든 곳은 그의 목표와 맞닿아 있다. 하룻밤을 묵을 집과, 한 번 올라갈 무대는 그가 성공을 위해 따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무명인 르윈은 스스로가 그곳에 머무를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다. 르윈을 소개할 말을 찾지 못하는 전 여자친구 진에게도, 르윈은 무명의 가수일 뿐이다.


 르윈은 가진 것이 없다. 카메라가 르윈의 뒷모습을 비추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르윈이 남에게 보여줄 것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르윈에게는 곡을 쓸 집이나 작업실도 없고 새 외투와 기타를 살 돈도 없다. 파트너와 생전에 낸 앨범이 성공했다면 큰 포스터라도 있었을 터인데, 르윈이 가진 것이라곤 유일한 LP는 그의 뒷모습에서 담기에는 작다. 카메라는 르윈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증명하고 싶은 것의 자리에서 르윈을 바라본다. 세상을 떠난 파트너의 자리에서 앨범을 보는 르윈의 표정을 읽고, 프로듀서의 자리에 서서 르윈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걸칠 옷 한 벌 없고/
동전 한 닢 없으니/
주여, 이렇게 돌아갈 순 없어요 - <500 Hundred Miles>

 르윈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는 곧 결핍의 이미지다. 르윈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그에게 행동을 강구하고 상황의 해결을 요구한다. 진의 수술비가 없을 때, 겨울 외투가 없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카메라는 르윈의 반응을 살핀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 것은 르윈의 몫이고, 르윈은 돈을 벌 기회를 찾아 나선다. 지금의 르윈은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카메라는 그의 뒤를 쫓지 않는다. 최초에 성공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었던 음악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르윈은 음악이 어떻게 되어가느냐는 누나의 물음에 그럭저럭 되간다고 답한다. '잘 되고 있다' 혹은 '그만 두려고 한다'라고 대답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자신의 음악이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르윈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음악으로 자신의 성패를 결론지으려는 생각이 없다. 물질적 부가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결론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연예계에 들어간 다음을 걱정하는 르윈의 모습은 철없어 보이지만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누나에게 아버지를 모시는 데 들어갈 돈을 달라고 요구할 만큼 절박하다. 다만 아직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살아갈 뿐이다. 물론 그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처지다.

 두 번째 이유는, 르윈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르윈의 뒤에는 그가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이 없어 카메라는 그 사람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다. 르윈은 음악을 하기 위해 포기한 것도 없으며 당장의 가난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율리시스를 잡으러 나간 동시에 닫혀버린 문은 르윈이 처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어딘가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율리시스라도 잡으러 길을 떠나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카메라는 고양이를 잡으러 뛰어가는 르윈을 보내고 군대로 복귀하는 트로이의 뒷모습을 잡으며 르윈의 처지를 부각한다.


 게다가 르윈은 스스로의 판단 하에 돌아갈 길을 지워버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르윈은 음악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자신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선원 증명서는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음악을 하지 않는 삶은 시체의 삶과 같다는 말로 음악 이외의 다른 길을 모두 부정한다. 또한 르윈은 짐과 녹음한 노래의 권리를 급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모두 넘겨준다. 르윈이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까닭은 그에게 여유가 없기 때문이고, 그의 가수 인생에 있어 부침을 겪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웅이고 뭐고 숨이나 쉬고 싶어요/(...)
세기의 인물따윈 안 돼도 좋아요/
돌아갈 수만 있다면 - <Please, Mr. Kennedy>

 르윈은 짐의 노래 가사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연주는 하겠는데 대체 누가 쓴 거야?'라는 질문에서는 성공한 가수인 짐과 르윈 사이의 격차가 느껴진다. 르윈과 달리 짐은 성공을 맛본 인물이다. 그는 새 기타를 얼마든 장만할 수 있고, 녹음할 스튜디오를 갖췄으며 가수로서의 모든 면에서 르윈보다 앞서 나간다. 그러나 르윈은 짐의 성공을 인정하고 부러워하면서도 그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 투어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인지도를 올린다거나, 계속해서 짐의 세션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잡지 않은 르윈이 홀로 성공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성공을 함께할 파트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르윈은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세 번째 이유이자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에 이르는 길에서 르윈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운명과도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트로이를 좋아하는지 이해하는 것도 벅찬 그는 성공하는 방법을 모른다. 르윈은 트로이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고 그의 매니저가 있다는 시카고로 향하지만, 차를 모는 그의 눈앞에는 휘날리는 눈발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르윈이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그가 시카고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는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는다. 시카고의 날씨는 뉴욕만큼이나 추웠고 눈이 온 날씨도 르윈을 반겨주지 않았다.

제인 왕비 진통을 한 지 어느덧 9일째/
진통에 너무 지쳐 더 버틸 수 없었네/(...)
제 배를 열어 아이를 꺼내주세요/(...)
하지만 가여운 제인 왕비는 돌처럼 식어 있네 - <The Death of Queen Jane>

 더군다나 한 가수의 음악적 성공은 그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음악의 성공은 그 음악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가수의 손을 벗어난다. 그는 매니저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지만 노래가 너무 우울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 곡은 가스등 카페에서 늘 "그놈이 그놈인" 노래만 불러오던 르윈이 내면에 감춰둔 채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던 노래였다. 매니저는 듀엣으로 활동하라는 답을 내놓지만 이미 파트너를 잃은 르윈에게는 답이 되지 않는다. 르윈이 매니저를 만나 그의 노래를 들려주는 순간은 성공에서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지만, 그의 처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성공을 위한 노력은 그에게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르윈이 다시 가스등 카페에서 공연하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가수 이외의 모든 가능성을 지워버린 르윈의 탓이 가장 크다. 그런 그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소 우스운 일일지 모른다. 가수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나 좌절을 겪었음에도, 돌아와 다시 무대에 오르는 르윈은 모든 고생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현실이 언제나 자신을 넘어뜨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무모함일 뿐이다. 더군다나 현실에 맞설 무기가 새로운 노래뿐인 르윈이 어려운 현실에 맞서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재밌는 점은 르윈은 가진 것이 없었음에도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르윈이 언제나 카메라를 마주본 것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영화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르윈을 향한다. 카메라는 그의 실패도 성공도 예견하지 않고 그를 관찰할 뿐이다. 르윈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역시 사람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르윈과 다르지 않음에도, 카메라는 동요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영화 안에서 르윈을 구원할 수 없지만, 그가 음악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지켜본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르윈은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골파인 교수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스등 카페에서 노래를 하는 르윈의 삶은 영화의 시작과 비교해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는 르윈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줄곧 르윈의 얼굴을 살피던 카메라가 르윈의 뒷모습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고양이를 잃어버린 르윈을 용서한 골파인 교수와, 르윈이 가스등 카페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돕는 진에게 자리를 넘겨준다. 르윈 역시 파트너가 죽고 나서 좀처럼 부르지 않던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한다. 르윈이 성공을 위해 필요로 했던 것은, 그의 무모함을 믿어줄 누군가의 존재였다.


 영화는 가스등 카페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르윈을 응징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비난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는 같은 공간에서 밥 딜런이 공연했음을 알린다. 그의 존재가 무모한 믿음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지만, 영화는 무모한 예술가들을 응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처음으로 카메라가 그의 뒷모습을 자랑스럽게 찍는 순간 역시, 영화 초반 가스등 카페에서 르윈의 공연을 보는 관객들을 담는 순간이었다.


사진 출처 - 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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