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결론 속에서 잃어버린 사유의 과정
겨울 내내 거의 매일 내리는 밴쿠버의 비는 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속도로 조용히 이어진다. 비가 스며들며 밴쿠버의 겨울 흔적을 남기듯, 생각도 어쩌면 속도를 내기보다, 꾸준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나만의 모양을 갖추는 것이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종종 삶을 하나의 결론으로 정리하려 한다. 잘 살고 있는지, 옳은 선택이었는지, 성공인지 실패인지....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결론이 아니라 진행형 속에 머물러 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와 이야기를 듣고 살아가지만, 정작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가로운 시간에 인스타나 쇼츠를 넘기다 보면 그 생각이 분명해진다. 손가락은 쉬지 않고 화면을 위로 밀어 올리는데, 생각은 점점 느려지고 머릿속은 조용히 비어 간다. 하나의 영상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영상이 자동 재생되고, 제목 몇 줄만 스치듯 봐도 이미 내용을 다 짐작하고 넘겨 버린다. 나중에 떠올려 보면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장면도, 맥락도, 내용도 다 사라지고, 그 영상을 만든 이의 의도와 결론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야기의 과정을 따라가며 스스로 판단하고 고민하기보다, 영향력 있는 누군가가 미리 정리해 놓은 결론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길게 풀어 설명하는 사람보다 결론부터 말하는 사람의 말이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들린다. 회의실에서, 댓글창에서, 심지어 일상 대화에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요약된 결론을 요구한다. 복잡한 이야기를 꺼내려하면 “그래서 핵심이 뭐예요?”라는 질문이 먼저 튀어나온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업무와 일상에서 과정은 조용히 증발하고, 결론만 또렷하게 남는다. 이건 아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방향성일 것이다. 15초 영상, 1.5배속 편집, 알고리즘 추천, AI 요약처럼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간결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 간결함과 편리함 속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 - 나의 선택이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망설이며 신중하게 고른 단어, 주저하는 마음으로 덧댄 말, 망설이며 붙인 단서, 쉽게 단정 짓지 못해 일부러 남겨둔 여백들이 점차 간결함과 정해진 결론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여백 속에서 우리는 결론 못지않게 중요한 힘이 되는 깨달음과 배움을 발견하며 살아왔다. 요즘 '생각'을 자주 ‘걷기’에 빗대곤 한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려면 차를 타는 게 효율적이지만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생각의 과정도 마찬가지로,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을 보며 순수한 시절들을 떠올리고,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불빛 속에 인생의 온기를 느끼고, 계절이 바뀌는 냄새와 미묘한 변화들 속에서 현재 삶에 대한 감사와 겸손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색의 힘은 각자가 살아온 방식에 따라 생각의 방향과 깊이는 서로 다르게 펼쳐지기에 그 안에 옳고 그름을 쉽게 나눌 수는 없다.
정답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왜 굳이 고생스럽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답을 찾는 일은 분명 이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잠시 멈춰 검색하면 되고, 긴 설명 없이도 요약된 결론을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얻은 답들은 대개 빠르고 정확하다. 하지만 내 사고를 토대로 이해하고 사고하는 건 쉽게 얻은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이해는 항상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생각은 돌아가기도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잠시 멈추기도 한다. 때로는 분명한 결론 없이 시간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생각은 점점 내 것이 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일부러 단정적인 문장을 쉽게 내놓기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그대로 말해보기도 하고 내가 지금까지 이해한 것은 여기까지라고 설명해 보기도 한다. 그럴수록 그 생각은 더 오래 남는다. 생각한다는 일은 새로운 답을 찾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지나온 생각을 다시 이해해 가는 과정에 가까운 것 같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답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열린 결말 속에서 계속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확신의 문장들 사이에 망설임을 한 줄 남겨두는 것. 빠른 결론 대신 느린 이해를 선택하는 것. 완성된 이야기보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여백있는 삶도 충분히 단단하고, 충분히 아름답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