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페루였을까요?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기 일보 직전인 제 심신이 왕복 일흔 시간이 넘는 이동을 용인할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학대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페루는 ‘남미 끝판왕’입니다. 지리적 이유로 그 입지가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더 공고하지요. 끝판왕을 깨고 싶기도 했을 겁니다. 지금 보다 더 시간이 많았을 때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찍은 근사한 사진은 뿌듯한 자랑거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정도의 이유라면 대안도 있었을 겁니다. 스칸디나비아의 오로라도 있고 호주 내륙 깊은 곳에 울루루라는 곳도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아 유명해진 동유럽의 국가도 있고요. 제게 세상은 대부분 미개척, 미지의 영역입니다.
저는 오래 이동하면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저를 괴롭히고 있는 불쾌한 감정들의 근원이 무엇인지 제 안을 해부해서 끄집어내고 마침내는 그것들을 다시 오기 힘든 아주 먼 곳에 버리고 오고 싶었습니다. 인천에서 애틀란타로 애틀란타에서 리마를 거처 쿠스코까지 가는 동안 특정 인물, 상황, 구조, 집단 등에 대한 원망, 혐오, 시기, 불만, 저주, 환멸의 감정들을 구체화해서 폐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종이에 적어 안데스 산맥 어느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잊었는지 제 자신을 검열했습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들은 제법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이 개인의 정서적 평화를 방해하는 근원을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삶을 혹은 타인을 대하는 본인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저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제 안에서 찾아 스스로를 다그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간 충분히 제 옹졸함을 탓하고 살았지만 불행은 그 자리에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죄책감의 크기만 커졌습니다. 앞으로는 내 탓, 남 탓이 분명한 삶을 살아 보고자 합니다. 남 탓도 적당히 하면서 자신도 다독여야 잘 살아지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이번 페루 여행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리마 공항 카페에서 비틀스가 나오고 갓난쟁이에게 젖병을 물린 제 또래의 남자가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러 주위의 공기가 유쾌해졌습니다.
-
페루 여행에 제일 필요한 세 가지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체력과 용기 그리고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안데스 협곡에서 탄생한 경이로운 잉카 문명을 목도하는 일은 평평한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는 것과 다릅니다. 물론 유럽 대도시 투어도 힘들죠. 도처에 자리한 중세풍 건물을 구경하고 박물관도 돌아야 하니까요. 특히 박물관은 오죽이나 큽니까. 하지만 마추픽추를 비롯한 잉카의 흔적은 최소 고도 3,500 미터 이상 고산에 위치하고 있어 체력 소모가 예상했던 것보다 컸습니다. 숨이 금세 가쁘고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을 동반한 고산병도 오락가락합니다. 운 좋게도 저는 증상이 오래가지도 자주 찾아오지도 않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여행 전체를 고산병으로 망치기도 합니다. 다년간의 여행으로 쌓은 관록(?)과 평소 운동으로 다진 체력을 과신하다 저도 한 방 크게 맞았습니다. 투어가 끝나는 매일 저녁 맥주 한 잔 마실 기력도 없어 잠들기 일쑤였으니까요.
두 번째는 용기입니다. 험준한 계곡을 오르락내리락해야만 비로소 잉카인의 삶에 접근 가능합니다. 낭떠러지를 불과 몇 센티미터 앞에 두고 곡예하듯 막추픽추를 향해 올라가던 버스 안에서 저는 미치도록 살고 싶었습니다. 실재하는 죽음의 공포를 목전에 두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삶을 향한 의지가 그토록 맹렬했던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거래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매일 그 위험천만한 길을 낡은 버스를 몰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기사님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분들이야 말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진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 졸이며 기다릴 가족들은 또 얼마나 큰 용기를 가졌을까요. 끼적이고 보니 용기는 일상을 영위하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용기 없는 자들에게는 감히 접근할 기회도 주지 않을 만큼 잉카 문명은 도도합니다. 아, 살아왔으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순댓국에 소주 한 잔 하고 싶은 밤입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입니다. 주요 잉카 문명의 잔재를 보기 위해서는 인천에서 출발해서 최소 서른 시간에서 서른다섯 시간을 이동해야 합니다. 왕복으로는 일흔 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입니다. 인천에서 미국의 도시를 거쳐 페루 수도 리마로, 다시 쿠스코라는 잉카 제국 수도에 도착하면 그제야 위대한 잉카 문명을 마주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저는 집에서 출발한 시간을 기준으로 딱 서른일곱 시간 후에 쿠스코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 등 주요 관광지까지는 편도로 서너 시간은 추가로 소요되니 페루 여행에는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다만 페루 여행사의 전문성이 모든 프로그램의 정시 시작과 종료를 약속하고 또 이행하므로 페루 도착 이후에는 별도 시간 낭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작은 위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