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우울감이 올 때
11월은 내 인생을 통틀어 우울한 일, 사건사고를 가장 많이 겪은 달이고, 원래 우울증 병력도 있는지라 계절성 우울증이 오곤 한다. 작년엔 왠지 모르게 11월을 무사히 보냈지만 몸이 어디서든 적응을 하면 이전의 증상을 모두 다시 갖게 된다. 아마 작년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보낸 11월이라 몸이 제대로 적응을 못했던 이유에서 멀쩡히 보냈나 보다.
해가 짧아진 것이 유난히 실감되는 올해 프랑스의 늦가을엔 우울감이 엄습했다. 20대 초반부터 중증 우울증과 그 외 덜 중한 정신의학적 문제를 겪어본 나는 스스로의 심리 상태를 항상 살피는 습관이 있다. 내가 우울한지, 기분이 좋은지, 기분에 변화를 준 요인은 무엇인지 등을 분석해서 적절한 처방을 하기 위해서이다.
새삼 걱정이 되어 심리 상담을 찾아봤는데, 프랑스 의료 시스템이 좋다고 한들 심리 상담은 정신의학과와는 달리 건강 보험으로 커버가 되지 않았다. 한 시간에 35유로 이상 하는 심리 상담을 여기서 또 한 번 테스트하기보다는 스스로 우울 자가 치료를 해보겠다는 다짐이 섰다.
우울감이 몇 주 지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약을 먹어야 하는 정도는 아니었기도 했고, 과거 정신건강의학과 치료 외에도 각각 3, 4개월씩 두 번의 심리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데 두 번 다 좋은 기억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가지 계획 중 하나는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경험상 이것만큼 우울감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 이미 운동은 주 3회 하고 있기도 하고 괜히 나가서 쇼핑을 하며 돈을 쓰기도 싫으니, 집에서 한국 음식을 열심히 만들기로 했다. 튀니지 여행 이후 도지기 시작한 한국 음식 향수병을 치유할 겸 우울감을 없앨 겸.
이미 여름에 우울감을 요리로 극복해 보고자 일주일치 식재료와 레시피 받아 만드는 구독 서비스를 썼었지만, 아무래도 한국인 입맛엔 별로 안 맞기도 하고 은근히 따라 하기만 하지 내 실력으로 남는 것 같진 않아서 처음엔 대충 레시피를 아는 한국 음식부터 다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사실 요리가 기분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동생이 직장일로 매일 야근 후 늦게 퇴근하고 엄마도 서울이 아닌 곳에서 일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들어올 때, 내가 집안일을 모두 담당하고 요리까지 했던 시기가 있다. 그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뒀다가 동생이 퇴근하고 먹으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가끔은 동생이 일하느라 밤을 새울 때 야식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일주일에 서너 번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끓이고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는 원래 잘 끓이는 편인데 김밥을 아는 바가 없었다. 엄마가 김밥을 쌀 때 어깨너머로 본 것이 다였다.
한국에서야 김밥은 어디서나 팔고, 사서 먹어도 가성비도 나쁘지 않으니 조리 방법을 알 필요도 없었지만, 파리가 아닌 프랑스 타도 시에서는 일단 볼 수가 없는 음식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다고 했던가. 레시피를 찾는 것이야 인터넷에서 쉽게 할 수 있으니 몇 가지 레시피를 정독 후 김밥을 만들 수 있었다.
엄마가 김밥을 만들기 왜 귀찮아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손이 많이 가는 편인 음식이다. 재료 공수에도 문제가 있는데 우엉이나 단무지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김밥과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주구장창 만들다가 내가 미역국도 끓일 줄 알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요즘은 미역을 구해서 미역국을 끓이거나 (야매) 어묵탕을 끓이거나 감잣국을 끓이기도 한다. 요즘은 레시피를 응용하여 이름 없는 내 맘대로 국(?)도 많이 시도해보고 있다.
핼러윈 기념으로 쿠키를 구우려다 망한 이후로 어쩌다 보니 가끔 쿠키도 굽고 있다. 특히 저녁에 할 일이 없을 때마다 쿠키를 구우면 크게 위로가 된다. 쿠키는 인터넷에서 찾은 가장 만만해 보이는 기본 레시피로 굽고 있는데, 우리 집 오븐이 오븐 겸 전자레인지라서 온도를 적당히 조정해야 해서 좀 태워먹은 경우도 있지만 구울 때마다 점점 나아지고 있기는 하다.
몇 주 전에 남자 친구에게 부탁해서 보르도에서 공수한 찹쌀가루로 최근엔 호떡도 세 번 만들었다. 믹스가 없을 때 밀가루, 찹쌀가루, 이스트, 설탕 적정량 섞으면 호떡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이민 오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반죽을 저녁에 만들어 밤새 발효시키고 오전에 만들어 먹고 있다.
재미있는 건 나는 한국에서 국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며 밥을 먹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특히 호떡은 별로 선호하는 음식이 아니었다. 요리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관심이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말 향수병이 온 것인지 아니면 겨울이라 더 그런지 따끈한 국물이 그렇게 당기고, 붕어빵은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니 호떡이라도 먹고 싶어진 것이다.
요리를 할 때는 당연하지만 잡념이 없어진다. 나 같은 경우 난생처음 시도하는 것도 많기 때문에 더더욱 집중하게 된다. 원래 청소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스타일이라 그렇겠지만, 뒷정리를 바로 하는 스타일이라 설거지와 주방 청소를 하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내가 만든 음식, 특히 호떡을 맛있게 먹는 남자 친구를 볼 때의 즐거움, 식비를 줄인다는 즐거움 역시 덤으로 따라온다.
게다가 한국 음식을 한 달 내내 먹으니 음식에 대한 향수가 조금 옅어지고 그렇다 보니 심리적으로도 좀 더 안정을 되찾았다. 워낙 밥(쌀)을 잘 먹지 않는 편이라 살면서 음식이 가지는 힘을 잘 몰랐는데, 이번에 한국 음식 향수병을 겪고 나니 그 영향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사람이 익숙한 맛에 끌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또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에서 힘을 얻게 된다는 것도 말이다.
한국에서도 혼자 살던 시기 우울과 불안감에 시달렸을 때 김치찌개라도 좀 끓여봤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요리 자가 심리 치료를 11월 내내 실행한 덕에 나는 위기의 11월을 적당히 넘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