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을 위한 그림책 --- ② 무라카미 히토미 『나무늘보니까』
고3 때도 아들의 삶은 중2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분 1초를 다투면서 겨우 지각을 면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오락실도 PC방도 아니고 집에 와서는 바로 침대 위로 다이빙~. 밥을 먹고는 책상에 앉아는 있는데 공부는 하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고 별다른 취미나 흥미도 없어 보이니 참지 못해 터져 나오는 나의 몇 마디는 아들의 짜증과 모자간의 불화만 부를 뿐이었다.
그래도 고3이 되어 나는 재기의 마음으로 야심 차게 고3 입시학원을 등록해 주었다. 아들은 무책임하고 의욕 없이 몇 달을 다녔고, 결국 나의 검열에 의해 한 과목만 남기고 모두 중단시켰다. 이런 결정에도 아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찾은 여유를 즐기며 중2의 라이프스타일을 이어갔다.
'그래, 내가 살아보니 행복은 성적순이 절대 아니야' 나는 이렇게 자위하면서 아들의 학업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았다. 다들 치열하게 보내는 중, 고등학생 시기를, 아들은 침대와 한 몸으로 그냥 게으르고, 무기력하게 보낸다고만 생각했다.
『나무늘보니까』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때 내 마음에서 놓아버린 아들 생각이 났다.
그림책에서 모든 동물들이 "최고는 누구?"에 혈안이 되어있는 동안, 어느 누구도 나무늘보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당연히 나무늘보가 뭘 잘하는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또래들이 모든 영역에서 '최고'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동안, 아들은 또래들의 목표와 계획에는 별로 마음을 두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집에서 아들의 존재는 그저 밥 잘 먹고 착한 아들이고 손자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아들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들의 할머니만은 '우리 OO가 머리가 좋아서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를 놓지 않았다.
느리고, 게으르고, 무기력해 보인다는 것은 생존에 치명적이다. 생존 수단이 창과 칼에서 지식과 기술로 바뀌었을 뿐, 강자만이 살아남으며, 강자는 늘 빠르고, 의욕이 넘치고, 자기 자신에 철저하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아들은 강자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다행히, 그리고 무사히 아들이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넓은 책상을 커다란 모니터와 컴퓨터가 차지하게 되었을 뿐, 아들은 바로 중2의 라이프스타일로 돌아갔다.
호기심이 유난스러운 큰 부리새의 한 마디로 자신이 '최고'인 동물들 사이에서 큰 동요가 일어났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동물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있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소낙비와 어둠 속에서 혼자 매달려있는
세상의 느림보들과 게으름뱅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당신도 최고야!
많은 부모들이 자신이 못다 한 전지전능한 강자의 꿈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그래서 돈도 잘 벌고...
첫 발을 떼는 아이의 모습과 '엄마' '아빠' 아이의 한 마디로 감격했던 부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 앞에 ㄱ,ㄴ,ㄷ, A, B, C를 펼쳐놓는다. '최고를 위한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런 최고지상주의의 부모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일단 감사하고 볼 일이지만, 부모가 버리지 못한 강자의 꿈 때문에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빗속과 어둠 속에서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부모가, 사회가 심어준 강자의 꿈의 망령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계속 쫓아다닌다. 나름 최고 레이스에서 밀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삶에서 만나는 소낙비와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 직원이 옥상에서 몸을 던지고, 억대 연봉자가 수백억 원을 횡령한다.
잠깐 가졌던 강자의 기대를 진작에 내려놓게 해 준 아들에게 감사하다. 내 삶도 강자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신께도 감사하다.
혼자서 소낙비와 어둠을 버텨낸 아들은, 군복무 후 미국 대학교로 편입,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취업해서 잘 지내고 있다.
< 읽을거리 >
☞『게으르다는 착각 』데번 프라이스 지음, 이현 번역, 웨일북
"나는 우리가 '게으름'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 강력한 자기 보존 본능임을 알게 되었다. 동기가 없고 방향을 잃거나 '게으르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몸과 마음이 평화와 고용함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뜻이다." (p.18)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 모두 나태해지고 무능해질 수 있으며, 약하다는 신호는 무엇이든 불길하다고 말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이러한 측면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욕구와 필요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라고 가르친다. 피곤한가? 그건 잠이 필요하다는 신호가 아니다. 그냥 게으른 것이다. 어떤 복잡한 것에 집중하기가 어려운가? 정신이 산만해졌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정반대다. 집중을 잘하려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한때 좋아했던 일이 싫어졌는가? 철이 없는 것이다. 부끄러울 정도로 동기가 없다면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더 몰아붙여여야 한다." (p.37)
"누군가 늦장을 부릴 때, 그것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손발이 묶이기' 때문이다. 주로 불안이나 크고 복잡한 과제를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는 혼란에서 비롯되며, 둘 다일 수도 있다."(p.79)
< 생각거리 >
☞ 동물들이 돌아가면서 자기를 뽑낼 때 다른 동물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누군가 자기는 무엇을 잘한다고 말할 때 내 마음은 어떤가?
☞ 사회에서 만나는 나무늘보같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시선과 평가는 어떠한가?
☞ "매달리기는 누가 최고지?"라는 질문에 나무늘보는 왜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