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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모 Nov 09. 2024

손의 쓸모

식사를 준비하면서 발견한 손의 쓸모

매 끼니를 요즘처럼 직접 준비해 본 적이 없다. 밥, 국, 반찬으로 한상차림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도, 나의 하루가 점심 준비로 시작하고 저녁 설거지로 끝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주방일로 하루 대부분을 보낸다.  


반백년 동안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먹고살았음에도, 아직까지 설거지 말고는 주방일은 여전히 어설프다. 월급쟁이 시절에 어쩌다 주말에 한두 끼를 준비할 때에도, 본가에서 얻어 온 밑반찬이 떨어지면 반조리음식으로 식탁이 차려지곤 했으니, 인과응보라고 할까.


준비된 식재료를 가지고도 요리 수준이 초급인데, 미국에서 익숙하지 않은 재료들로 요리를 한다는 것은 아주 큰 모험이다. 초급반 학생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상급반에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다. 모양도 색깔도 이름도 낯선 식재료가 천지인데, 그나마 익숙한 듯한 식재료들로 생각했던 맛과 다를 때가 많다. 난감한 상황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장 볼 때마다 카트에 단골로 담겼던 콩나물, 두부를 사기 위해서 무려 30분 거리에 있는 한국마트까지 가야 하고, 가격도 한국보다 비싸다.  그러니, 아직 요린이라 할 수 있는 나에게 여기서 한식을 준비하는 것은 매번 큰 도전이다. 한 손으로도 뚝딱 할 수 있다는 간단한 밑반찬부터 김치만 있으면 끊인다는 김치찌개도 나는 매번 '도전!'을 마음속으로 외친다.


한식을 기다리는 아들의 기대와 격려 속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김치찌개는 김칫국이 되고, 서로 엉켜 붙어버린 감자조림, 잡채의 면은 너무 불었고, 배추대신 양배추로 담근 김치는 젓갈맛뿐이다. 살면서 그다지 많은 실패를 맛본 적이 없기에, 한 젓가락만으로 찡그려진 아들의 얼굴을 볼 때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나는 한식은 진작에 포기했다. 아들이 알던 맛을 피해 가기 위함이다.


대개 식사 1시간 전부터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식사 준비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메뉴를 정하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것이 변변치 않다 보니 식재료를 보고도 쉽게 메뉴가 떠오르지 않는다. 냉장고를 열어보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런, 저런 식재료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머릿속에서 기획안을 만든다. input-process-output의 과정도 머릿속으로 그려봐야 안심이 된다. 


정해진 규칙도 방법도 없으니 매번 메뉴가 새롭다. 이걸 퓨전요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한정된 시간 내 완성해야 하는 프로젝트일 뿐이다. 다행히 프로젝트 대부분이 폭망의 수준을 면했던 것 같다. 모두요리 블로거들과 유튜버 덕분이다. 그들이 생존에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다. 매번 고맙다. 


어느 날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다가 문득, 내 손을 보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도 하루종일 책상 위와 컴퓨터 앞에서 분주했던 내 손과 손가락이 제법 능숙하게 식재료를 다듬고 씻고 썰고 요리를 한다. 아주 기특하다. 요리를 대하는 내 머리 속의 움직임과 수용력보다 훨씬 순발력 있게 불평 없이 제 몫을 해내고 있다. 


"오, 창조주시어, 제 손의 쓸모를 생각하니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을 제게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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