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New Jersey
저녁을 일찍 먹고 대충 치워놓서는 집 밖으로 나선다. 온통 초록색 세상으로 뛰어든다. 잔디밭을 곧게 가르는 좁은 보도를 따라서 도로변으로 나간다. 간간히 켜져 있는 창문 안 저녁 불빛으로 대충 사람들의 피곤한 하루를 어림잡는다. 다시 이어지는 좁은 보도를 따라 계속 걷는다.
그리고는 타운하우스 단지의 철문을 통과하여, 정면에 보이는 대형 마트의 간판에 눈길을 한번 주고는, 오른쪽으로 살짝 돌아서서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조금 더 내리막길로 좁은 입구를 통과하면, 나의 산책길이 시작된다.
넓은 길의 왼쪽은 나지막한 높이로 넓게 터를 차지하고 있는 공유오피스 단지의 측면이 짧게 이어져있고, 오른쪽에는 사람 손이 거의 타지 않은 듯한 크고 작은 그리고 굵고 가는 나뭇가지들과 잎들이 뒤엉켜있는 숲이 가깝게 펼쳐져있다. 사람들을 절대로 들여놓지 않을 듯이 못생긴 숲의 모습이다. 그래서 정말 숲 같다.
그런데 그 숲이 은밀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보이지 않는 장막 때문일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가끔 길 가까이의 풀밭에서 느긋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사슴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도시 한복판에서 사슴을 만나다니...
그 숲이 우리나라에서는 지방에 군이나 읍까지 가야 있을 법한 제법 큰 규모의 숲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말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일상적인 곳이고 걸어서 10분 정도면 제법 큰 쇼핑몰도 있는 곳이기에 사슴들이 숨어있는 그 숲이 신비로울 뿐이다. 도대체 그 사슴들은 숲 속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늦은 오후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슴들은 대충 네다섯 마리의 암사슴들과 아기사슴들 무리이다. 그들에게 약 5~6미터쯤까지 다가가면, 저녁식사에 열중이던 사슴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고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는 나를 주시한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면 하나둘씩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물론 나와 안전거리가 계속 유지되는 경우에는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떼지 않는다. 겁 많은 초식동물의 본능으로 육식동물인 나를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슴들이 나를 피해 도망갈 때마다 늘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사슴들이 놀라서 숲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창조주의 탁월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는 듯 가늘고 기다란 다리를 높이 들어 사뿐히 뛰어올라서는 재빠르게 숲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군더더기없이, 먹다만 식사에도 미련없이 가볍게, 그러나 기품 있게 자리를 뜬다.
그리고 어느 날, 솜털 같은 비가 흩뿌리던 늦은 오후 산책길에서 드디어 '그'를 만났다. 하늘로 뻗어있는 왕관 같은 멋진 뿔을 가진 수사슴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수사슴은 암사슴들보다 나를 더 많이 경계했다. 마치 신기루처럼 내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그 뿔 왕관을 쓴 자태를 흩날리는 빗 속에서 멀리 서 잠깐 보았을 뿐이다. 덕분에 그 숲에 대한 신비감이 한층 더해졌다.
본격적인 나의 산책은 숲을 지나 이어져있는 주택가를 따라 걷는 것이다. 집들 하나하나를, 지붕 끝에서 차고 앞 드라이브웨이까지 꼼꼼히 훑어보면서 걷는다. 마치 백화점에 걸린 옷들을 구경하듯이... 어떤 집은 잡초 한뿌리 없이 초록색 카펫이 깔린 듯 잔디밭은 흠잡을 데 없고, 현관 앞에 꽂힌 장식물도 그럴듯하고, 집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도 단정하다. 또 어떤 집은 창 틀에 놓아둔 작은 촛대등의 작은 불빛이 너무 낭만적이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곳곳에 무궁화가 한창이었던 어떤 집은 지금은 수국이 탐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눈길이 머무는 모든 곳마다 집주인의 땀과 시간이 고스란이 묻어난다. 눈으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쏟았을 노고에 작은 한숨이 나오니, 이런 그림같은 집들이 내 것이 되기에는 이미 틀린 것 같다.
바야흐로 여름의 끝자락이라 현관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들의 졸업축하 푯말, 곧 있을 대통령 선거 때문인지 국경일도 아닌데 처마 끝과 정원 한쪽에 걸린 성조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