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나에게 이것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난 장래희망이 없었다.

by 보라보라

내가 보관하고 있는 물건 중에는 학창 시절 관련된 물건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 같이 껴있는 생활기록부가 있다. 그 내용을 읽다 보면 성적보다는 어릴 적 장래희망이 눈에 띈다.

검은색 볼펜으로 또박또박 쓰인 운동선수와 약사라는 글자다. 그때도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다시 보니 웃음이 난다.


보통 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라고 물으면 요즘 어린 친구들은 유튜버, 요리사라고 한다는데 그때 난 대답을 못했다. 그 시절의 나는 슬프게도 어른이 되면 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없었다.




1. 아빠가 꿈꿨던 딸의 장래 희망은 운동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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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외모적으로 자신을 많이 닮은 나를 보고 운동 유전자도 본인을 닮았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러니 나의 운동 소질은 확인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딸의 장래 희망을 운동선수라고 쓰신 것이다.

매우 사심 가득한 희망사항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때 달리기 시합 때였을 것이다. 난 분명 뛴다고 뛰었는데 내가 꼴찌였다. 창피한 것도 몰랐다. 내가 느리다는 생각보다 애들이 빠르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뛰었으니까 다른 친구들이 꼴찌 했다고 놀리는 게 별로 기분 나쁘지가 않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교장 선생님은 오히려 열심히 뛰었다고 나를 따로 불러서 1등 한 친구보다 더 많은 노트를 주셨다.


하지만 아빠는 나에게 실망했고, 엄마는 웃으시며 달리기 한 게 맞냐고 물었다. 어린 나는 달리기가 그렇게 중요한 시합이었나? 달리기 잘해야만 하는 거였나??라고 생각하며 어리둥절해했다.


이때를 시작으로 난 운동회 때마다 달리기가 제일 싫었다. 하지만 다른 운동들은 아주 못하지는 않았다. 딱 보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난 운동에 소질이 없었고 현재도 그렇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운동선수를 장래희망에 적을 수 있냐고 다들 배꼽 잡고 웃는다.


2. 엄마가 꿈꾼 딸의 장래 희망은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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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약사가 되길 바랬다. 이유는 간단하다. 외할머니가 한국 전쟁 시절 총상을 입으셔서 상황이 좋지 않아 치료가 늦어져서 다리가 불편하셨다. 그래서 거동도 어려웠고, 그로 인한 여러 합병증도 앓고 계셨다. 그래서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이것저것 약을 지어주는 약사 손녀로 만들고 싶었던 거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왜 의사가 아니고 약사야?”

“의사는 수술도 해야 하고, 병원에서 환자들만 계속 만나고 힘든데 약사는 그래도 약국에서 약만 주면 되니깐.”


의사는 의사대로, 약사는 약사대로 다 힘든 일이라는 걸 어른이 돼서 알게 되었지만, 그때 엄마는 동네 약사분이 편해 보였던 것이다. 이 역시 매우 사심 가득한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도 엄마 편을 더 많이 들곤 했다.

“우리 손녀가 약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할아버지 안 아프게 해 주고, 오래 살아서 네가 시집가는 것까지 볼 수도 있을 거야. 우리 손녀 덕분에 할아버지도 장수하겠다!”


3. 나의 장래 희망은 그나마 엄마의 꿈이 조금 더 나에게 가깝게 느껴졌다.


사실 아빠가 원하는 운동선수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난 알 수 있었다. 달리기가 싫기도 했지만 운동에 소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나마 공부는 좋아하니 엄마가 원하는 약사가 어린 마음에 조금 더 끌렸다.


어른이 되면 난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해야 멋질까? 무슨 일을 해야 행복할까? 이런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냥 막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고, 내가 공부만 잘하면 될 것 같다고 하고, 또 어른들은 내가 그걸 하면 온 가족이 행복할 것 같다고 했기 때문에 난 어느 날부터 나의 장래희망은 약사라고 막연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난 너무 몰랐던 걸까. 아니면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그냥 어린 나에게는 막연히 어른은 시간만 흐르면 되어버리는 것이었을까. 정말 되고 싶은걸 빨리 찾는 게 인생의 정답이었을까.


하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에서라도 다행히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아진 게 너무 좋다. 난 정말 속도가 느린 사람이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엄마는 요즘 이것저것 시도하는 날 보면 매번 말씀하신다.

“네가 20대 때 지금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 지금이라도 내가 이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냐?”

“그래, 이제라도 네가 원하는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밥 잘 챙겨 먹으면서 해.”

“살 빼야 돼!”


엄마! 엄마가 지켜볼 때 꼭 내가 이룬 꿈을 보여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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