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추억

아빠에게 배운 첫 술

by 보라보라

고등학생이 된 후 난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줄어들었고, 특히 아빠와는 하루에 한 번 정도 마주쳤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매일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아빠가 마중을 나오셨기 때문이다.

이때 서먹한 부녀 사이에 대화는 거의 날씨나 시험 이야기 정도로 짧은 이야기였고, 다행히 집이 멀지 않아 서먹한 이야기가 끝날 때쯤 집에 도착했다.

아빠와 나는 각자의 역할을 하기 바빴고, 가끔 각자에게 특이 사항은 없는지 확인하는 사이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였다.


수능이 끝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겨울날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빠가 내게 사인을 보냈다. 우리가 다른 가족들 몰래 사인까지 주고받을 사이가 아닌데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아빠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나갈 준비 해봐.” “엥? 어디 나가게?” 씩 웃기만 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식구들에게 별말 없이 아빠랑 나는 차례대로 현관을 나섰다.

마당에서 만난 아빠는 “우선, 따라와 봐.”라고만 하셨다. 길을 나서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밤 외출이다 생각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아빠와 함께 조용히 걸었다.


번화한 먹자골목 뒷길로 들어서자 조용한 골목이 나타났고, 그 길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불빛은 나란히 선 포장마차였다. 난 포장마차가 들어선 골목길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밤에만 나타나는 포장마차라 그런지, 아님 골목 구석에 있어서 그런지 분명 아는 길이었는데 분위기가 달랐다.


아빠는 맘에 드는 포장마차로 들어갔고, 난 처음으로 늦은 심야 시간 술을 파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아빠와 나란히 앉아 어색하게 포차 안을 둘러보고 있을 때 아빠는 능숙하게 “소주 한 병, 오징어 회요.” 주문하셨다.

음식과 술이 나오자 아빠는 내게 잔을 내밀면서 “아빠가 술 알려줄게.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게 좋은 거야. 수능 보느라 고생했다.” “어..”

아빠가 따라준 첫 소주잔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아빠는 내게 “아빠한테 따라봐.”라고 하셨다. 난 아빠가 알려주는 방법대로 아빠에게 처음으로 술 한 잔 따라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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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빠와 어색한 잔 맞춤으로 짠하고 난 뒤 고개를 돌리고 소주 한 모금을 넘기게 되었다. 소주의 독한 쓴맛과 알콜기 가득한 향기가 내 입안으로 들어왔고, 목구멍은 아주 뜨겁게 느껴졌다. 쓴 표정을 짓는 날 보고 아빠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이제 안주를 먹는 거야. 오징어 회 먹어봐.” 난 이 쓴맛을 없애고자 다급하게 오징어 회에 초고추장을 듬뿍 찍어 먹었다.


“아휴. 이렇게 쓴 걸 왜 마셔?” “이제 어른 된 거 축하해. 내년에 대학교 가서 마실 텐데 맥없이 술 먹고 취하지 말라고 아빠가 술 가르쳐 주는 거야. 학교 가서 선배들이 마시라고 한다고 그냥 무리해서 먹지 말고 그럴 때 물을 많이 마셔. 그럼 다른 애들보다 덜 취할 거야. 소주는 원래 쓴데 나중에 먹다 보면 쓴지도 모르고 개운하다 할 거야. 그때는 진짜 술을 알고 마시는 사람이 되는 거지.”라고 세상 무뚝뚝했던 아빠가 내게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난 매우 놀라웠다. 아빠에게 술을 배울지도 몰랐거니와, 아빠가 이렇게 자상했나 싶은 느낌도 있었고, 아빠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이후 술 탓인지 기분 탓인지 난 아빠에게 처음으로 가슴속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빠, 나 수능 잘 못 봤어. 아마 대학교는 아빠가 실망할 것 같아.”라고 말씀드리자,

아빠는 “괜찮아, 고생했어. 우선 입학해서 길을 찾으면 되지. 그리고 넌 우리 집에 큰딸로서 잘해줬어. 아빠가 너한테 큰소리로 혼낸 적 없잖아. 걱정 마. 잘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아빠를 향한 무뚝뚝하게 냉랭하기만 했던 내 마음도 사르르 술기운과 함께 녹아 버렸다. 나는 주책없이 고인 눈물이 아빠에게 보일까 고개 숙여 소주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와의 첫 술잔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새 골목길은 하얀색 얇은 이불을 덮은 것처럼 하얗게 눈이 내렸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늦은 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아빠랑 단둘이 걸으며 뽀득뽀득 발자국을 남기니 더 운치 있고, 아빠랑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행복했다.


그때까지 내가 생각하는 아빠는 무뚝뚝하기만 하고 나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날 아빠의 다정한 모습을 보게 됐다. 수능이 끝나고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내 마음고생을 아빠에게 위로받은 것이다. 이제 와 보니 오히려 내가 아빠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밤이기도 했다.


엄마와의 추억을 생각하다 보니 아빠 하고도 이렇게 좋은 추억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구나 뒤늦게 깨달으며 아빠와의 추억을 글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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