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마음을 담아.

by 보라보라

6.25 전쟁을 말하면 난 먼 역사라고 생각했지만, 내 옆에 증인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고, 외출 시 항상 휠체어를 타고 계셨다. 집안에서는 아플 때나 주무실 때만 누워계셨지 그 외는 항상 앉아 계셨다.


현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호국원에 함께 계신다. 외할아버지는 전쟁을 두 번 겪으셨고, 외할머니는 한국 전쟁에서 다리에 총을 맞으신 후 한쪽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두 분이 받은 아픔과 고통을 호국원에 모시는 걸로 후손들이 대신 보상받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thum_ICNC013_116_2_2018072313243652.jpg?type=w1 출처 : 이천 호국원




엄청 부지런한 성격의 외할머니는 한쪽 다리가 불편해지면서 좌식 생활을 주로 하게 되었고, 자식들은 남녀를 구분 짓지 않고 외할머니를 위해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과수원과 밭을 가꾸시는 와중에도 집안을 도와주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머니는 자신을 보필하다 더 빨리 돌아가신 것 같다고 매우 상심이 깊었고,그 후 남겨진 외할머니는 남은 가족들이 서로 도우면서 돌봐드렸다.


외할머니는 총상을 입은 후부터 몸은 안 좋아졌고, 연세가 들면서 류머티즘 관절염에 파킨슨병까지 겹쳐서 외할머니는 앉아 계시는 와중에도 다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부위는 모두 떨림이 있었다. 하루에 드시는 약도 한 주먹 정도의 양이었다. 아무리 용한 약을 쓰고 병원을 다녀 봐도 차도가 있지 않았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기력이 더 약해지셨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그 와중에도 성경 책은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읽으셨고, 기도도 매일 하셨다. 그래서 그랬는지 몸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외할머니의 정신은 더 또렷해지셨다. 그래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의 결정은 외할머니께 상의해서 많이 결정되었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쓰러진 후 병원에서 지내게 되었고, 엄마는 매일 외할머니를 보고 왔었다. 우리도 주말이 되면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를 뵙는 게 우리의 주말 일과 중 하나였다. 그땐 항상 바나나 우유를 사갖고 갔다.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간식이 바나나 우유였기 때문이다. 무뚝뚝한 나도 외할머니를 만나러 갈 적마다 언제나 바나나 우유라도 사 갔었다.


16-1.jpg?type=w1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어느 날 병원에서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외할머니의 그 맑은 정신은 점점 꺼져가고 있고, 엄마와 몇 명만 겨우 알아보시며, 신체적으로는 움직이고 있는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결국 그날 외할머니는 병원에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우리 집에서 따뜻한 밥에 집안 온기를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주치의가 허락해 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병실에서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후 모두 슬픔에 갇혀있게 되었는데 엄마는 특히나 심했다.


엄마가 걱정돼서 나도 한동안 엄마만 생각했었다. 한동안 엄마는 심한 우울증을 앓아야 했고, 그 와중에 엄마는 외할머니한테 모질게 말했던 일, 서운하게 행동한 것들만 생각나서 더 힘들다고 하셨다. 다행히 1년 정도 지나자 엄마도 그 우울감에서 벗어났고, 대신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차분해졌다고 해야 할까..




엄마는 내가 아는 어른들 중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제일 정성을 다해 돌봐드렸고, 마음을 쓰셨다. 하지만 그분들을 보내드리고 나면 어쩔 수 없나 보다.

더 잘해드릴걸, 더 자주 찾아뵐걸. 그런 아쉬운 마음.


잘하려고 해보지만 부모의 사랑 크기는 헤아릴 수 없는 것 같다.

난 나중에 후회보다는 부모님이 건강히 옆에 계실 때 자주 함께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부모님과 나의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계속 줄고 있는 것만 같다.


SE-defa9553-a4cb-4d0b-bb15-fbfc6186aa33.jpg?type=w1 © roymuz,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엄마는 김부각이 싫다고 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