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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Nov 04. 2020

단무지는 빼고 싸주세요.


나는 김밥을 무척 좋아한다.

뷔페에 가서 초보자들이나 먹는다는 음식 중 하나인 김밥을 꼭 3-4개라도 먹어보고 나온다.

그리고 어느 지역을 여행 갔을 때 김밥이 유명하다고 하면 꼭 먹어보게 된다.

그중 좋아하는 김밥은 경주의 교리 김밥이다.

그래도 세상 제일 맛있는 김밥은 뭐냐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 엄마표 김밥이라고 할 것이다.

아무리 고급 진 재료로 넣는다고 해도 우리 엄마 손맛은 이길 수 없는 무적의 김밥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엄마가 집에 있는 재료로 급하게 싸준 김밥. 


평소 분식류를 좋아해서 치즈군과 종종 동네 분식집에서 한 끼를 해결하기도 한다.

요즘은 즉석에서 김밥을 싸주는 가게가 많아 김밥을 주문할 때 각자의 요구 사항도 포함된 주문을 자주 듣게 된다.

<햄 빼주세요.> <오이 빼주세요.> <시금치 더 많이 넣어주세요.> 등등.


그런데 요즘 나도 김밥 주문을 할 때 치즈군의 요구 사항도 챙겨서 주문한다.

"사장님. 김밥 하나는 단무지 빼고 싸주세요."

그럼 사장님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어보신다.

"단무지를 빼 달라고?? 고기 안 먹는다고 햄은 빼 달라고 해도 단무지를 빼?"

"네. 단무지 없는 김밥을 김치에 먹는 게 더 맛있대요."

"아.."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마지막 짧은 동의로 끝나게 된다.


사실 치즈군이 김밥에 단무지를 빼 달라는 요구 사항을 나도 이상하게 느꼈다.

심지어 김밥에 절대 빠지면 안 되는 녀석 중 하나가 단무지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빼라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제정신이야? 김밥 먹기 싫다고 나한테 시위하는 건가?'




난 단무지를 김치만큼 좋아한다.

어릴 적 아빠는 단무지 공장 견학을 다녀오신 후 우리 가족에게 단무지 먹지 말라는 엄포를 내리셨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먹었다. 달콤 새콤 한 단무지가 맛있는데??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

김치를 먹을 때보다 입안을 걱정 안 해도 되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김치보다 단무지를 찾게 된다.

단무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고작 그거야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냥 맛있어서 좋아하는 건데.




치즈군의 이런 요구 사항은 우연히 생긴 것이다.


어느 날 김밥을 먹다 단무지가 너무 커서 빼고 먹어봤는데 처음에는 단무지가 빠져서 담백한 김밥이라고 느껴졌고, 두 번째로 먹을 때는 단무지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다른 재료들의 맛을 하나하나 더 깊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먹을 때는 김밥을 먹고 나서 김치 한 조각을 먹었더니 김치가 입안을 깔끔하게 청소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이후 치즈군은 김밥을 먹을 때는 단무지를 빼고 대신 김치와 함께 먹게 되었다.



꿋꿋하게 단무지를 넣고 먹는 날 보고 치즈군이 내게 단무지를 빼고 먹어보라 했다.


치즈군이 먹어보라는 대로 먹어서 실패한 때는 느끼한 음식 빼곤 없었기에 그를 믿고 나도 단무지를 빼고 김밥 하나를 먹어 봤다.



처음에는 담백한 김밥이네라고 생각하며 오물오물 씹고 있는데 단무지가 들어있는 김밥보다 훨씬 안에 다른 재료들의 맛을 하나하나 더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신기하다 생각하고 한 개 더 집어먹어봤다.


"오~ 단무지 빠진 김밥은 맛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맛있네. "


치즈군은 내 반응에 신나 하며 말했다.


"자기야, 단무지가 맛이 너무 강해서 다른 재료들 맛을 좀 뺏는 것 같지 않아? 대신 심심하다고 생각 들면 김치를 한 조각 먹어봐. 그럼 김치는 단무지처럼 다른 애들 맛을 뺏지 않고 입안을 깔끔하게 다시 정리해 주는 느낌이야."

"오~~ 누가 보면 맛 칼럼니스트인 줄 알겠어. ㅋㅋㅋ"


단무지를 뺀 김밥 한 조각을 먹다가 김치를 한 조각 먹어보니 치즈군의 말처럼 느껴졌다.

또 김밥 먹을 때 라면이나 떡볶이를 같이 먹게 되는데 이때 나트륨을 조금 덜먹게 된다고 단무지 빠진 김밥 예찬으로 치즈군은 나를 엄청나게 설득했다.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고, 맛도 괜찮았다. 나름 새로운 김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단무지가 들어간 김밥을 먹는다.

치즈군의 말에 동의하지만 나마저 단무지를 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내가 먹는 김밥에 단무지를 아주 빼버린다는 건 오랜 친구와 절교한 기분이 들 것 같기 때문에 난 그냥 치즈군의 취향에 동의해 줄 뿐이다.


© loilamtan, 출처 Pixabay


그 뒤로 나는 김밥 집에 가면 치즈군의 주문도 잊지 않고 해 준다.


"사장님. 김밥 하나는 단무지 빼고 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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