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를 읽고
누군가 '최애 영화'를 물어보면 고민이 돼요. 밀양의 울림만큼이나 라라랜드의 떨리는 낭만을 좋아합니다. 대화로만 100분을 채워낸 비포 선라이즈를 10번 넘게 볼 정도로 애정해요. 반대로 미술 작품 같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만큼 좋아하죠.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랜 토리노 같이 묵직한 영화를 존경하지만, 우울할 때면 바스터즈처럼 잔혹한 쾌감을 주는 영화를 탐닉하곤 해요. 좋은 영화 앞에 단 하나의 취향은 무기력합니다.
그치만 가장 좋아하는 감독을 물어본다면 저는 별 망설임 없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이야기합니다. 데뷔작인 환상의 빛부터 많은 이들이 인생작이라고 꼽는 원더풀 라이프, 걸어도 걸어도, 어느 가족,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등 꽤 많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 설레는 맘으로 모든 작품을 보았어요. 부모의 이혼, 뒤바뀐 아이, 대안 가족- 다양한 소재를 통해 '관계'에 대해 아주 세밀하고 깊숙하게 파고듭니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한 번도 맘 편히 비난할 적을 내어 주지 않는 것이에요. 심지어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 결국 죽음으로 몬 무책임한 엄마조차(영화 ‘아무도 모른다’). 그녀를 마녀로 부각하면 이야기는 극적이 되지만, 일본 사회는 한 개인을 단죄하는 것에서 자위하며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이겠죠. 나로부터 반성을 시작하는 사회가 되어야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것. 절대 악이 따로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남을 힐난하느라 나를 돌아볼 수 없으니까요.
성찰하는 어른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치판을 볼 때 끔찍한 것은 후보의 자질이나 개인사가 아닙니다. 타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그로써 내 편을 만드는 가장 쉬운 길을 택하는 모습이 경솔하고 저급하죠. 다른 사람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간단해요. 하지만 성별이나 태어난 지역 같은 것이 한 사람을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친구와 나누는 대화, 좋아하는 책, 즐겨 듣는 음악, 휴일을 보내는 방식,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며 상대를 대하는지- 그런 것들이 서로 다른 우리를 만듭니다. 그렇기에 다름과 차이를 빌미로 선을 긋고야 마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천박함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의 영화를 닮은 이들이 많아지기를. 아니, 그전에 나 자신이 그런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 되길.
단적으로 말하면 상영 중의 야유에 가까운 웃음에서는, 양질의 지성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거북함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부시가 상대를 업신여길 때 짓는, 품성이 결여된 경박한 웃음과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함은 문제 삼지 않고, 상대를 이해력 없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러한 품위 없는 태도가 부시의 본질이라면, 설사 부시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쪽은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진정한 의미의 '반 부시'가 아닐까.
내가 감독한 <아무도 모른다>는, 어머니에 의해 남겨진 사 남매가 도쿄의 한 아파트에서 1년간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칸에서는 상영 후 나흘간 여든 곳 가까운 해외 언론사의 취재를 받았는다, 가장 많이 반복해서 질문받거나 지적된 점은 "당신은 영화의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아이를 버린 어머니도 단죄하지 않는다"였다. "영화는 남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판사도 아니다. 악인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지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나 싶다"라는 게 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이클 무어의 자세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 고레에다 하로카즈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 에서 마이클 무어의 영화 ‘화씨 911’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