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계절이 다가오면 꺼내보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퇴근 후 요가를 하고 영화 한 편을 보며 하루를 마감하곤 해요.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나만의 오롯한 시간이죠. 대개는 보고 싶은 영화들을 잔뜩 저장해 두고 그날 빠지고 싶은 무드에 따라 고르는 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영화 중 끌리는 게 하나도 없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 결국 택하게 되는 영화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입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영화가 지적 향연으로 비치지 않고 달콤한 초콜릿이 가득 든 초콜릿 상자 같은 영화였으면 한다고 말했어요. 그만큼 이 영화는 예술 작품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고전 문학처럼 섬세해요. 동성애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정인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냥 두 주인공의 성별이 남자인 것일 뿐이죠.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주인공 엘리오와 올리버가 아닌, 엘리오의 부모님입니다. 그들은 아들이 느끼는 감정을 깊이 존중하고 귀중하게 여겨요. 그래서 아들이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엘리오는 어쩌죠’라며 걱정합니다. 그리고 첫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마지막 여행을 권해요. 사랑하는 동성 연인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져 서럽게 우는 아들을 옆에 태우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묵묵히 운전하며 집으로 데려오는 어머니라니. 이보다 더 멋진 엄마를 영화에서 본 적 있나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여운이 남는 것은 마지막에 아들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긴 대사입니다.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마음을 잔뜩 떼어낸다면 서른 살쯤 되었을 땐 남는 게 없단다. 그땐 새로운 인연에게 내어줄 게 없지. 그런데 아프기 싫어서 그 모든 감정을 버리겠다고? 너무 큰 낭비지.
주제넘은 말이었니? 그럼 하나만 더 얘기할게. 이 얘긴 좀 편할 거다. 나도 기회가 있었지만 너희와 같은 감정을 못 가져봤어. 늘 뭔가가 뒤에서 붙잡았지. 앞을 막아 서기도 하고.
어떻게 살든 네 소관이지만 이것만 기억하렴. 우리 몸과 마음은 단 한 번 주어진단다. 그런데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닳아 해지고 몸도 그렇게 되지.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는 시점이 오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훨씬 적어진단다.
지금의 그 슬픔,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아버지의 대사 중에서
비록 그것이 슬픔일지라도 지금의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간직하라는 말. 누군가로 인해 흔들리는 스스로를 보기 싫어 정작 솔직한 마음을 외면하고 숨긴 제게 따뜻한 다독임으로 다가왔던- 사랑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위로의 장면이에요.
이 영화의 서사가 약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에게(물론 그런 감상평도 있을 수 있지만) 첫사랑의 기억을 살포시 꺼내어 보시기를 권해요. 우리의 첫사랑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았어요. 사소한 사건들로 가득해서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죠. 그 느낌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너무나 열심히 배운 탓일지도 몰라요. 때로는 지금 느껴지는 마음을 또렷이 응시하고, 분출하고 취해보는 것도 필요할 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