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의 반짝이는 영화 '레이디 버드'에 대한 사사로운 감상
부모님의 집. 본가. 태어나고 자란 곳. 어떤 표현도 제가 느끼는 정서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지만, 그곳에서 좋아하는 순간만큼은 또렷이 말할 수 있어요. 바로 엄마와 손을 꼭 붙들고 잠드는 밤입니다. 제가 집에 가는 밤이면, 우리는 마치 의식처럼 손을 꼭 잡고 눕습니다. 사실 저나 엄마나 몸을 자유로이 두어야 잠을 잘 자는 편이라 손을 맞잡고 잠드는 게 불편한데 말이죠. 그래서 자다 보면 자연스레 손을 놓게 되는데, 중간에 한 명이 깨면 다시 손을 뻗어 꼬옥 쥐곤 합니다. 잠에 취해서도 다시 잡는 엄마의 손을 느낄 때면 충만한 행복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죠. 그리고 영화 ‘레이디 버드’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첫 장면이 떠올라요. 엄마와 딸이 누워 있는 모습을 오버헤드 쇼트로 찍은 씬입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감독 그레다 거윅이 이 영화에서 가장 공 들여 찍은 장면이라고 해요. 서로를 향해 누워 있는 모녀가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묘하게 보입니다. 이후에도 영화 내내 그녀들을 겹쳐 보이게 하는 장면이 교차 편집으로 나옵니다. 딸은 계속해서 빛(관심과 사랑) 속에, 엄마는 어둠(불을 밝히는)에 있어요. 더 말할 필요 없이 빛과 어둠은 늘 공존하죠.
레이디 버드는 ‘10대들의 우정과 사랑을 다룬 성장 영화’라고 설명되곤 합니다. 그런데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를 ‘늘 부딪히지만 사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엄마와 딸의 러브 스토리’라고 말해요.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 주인공 크리스틴은 고향 새크라멘토에 답답함을 느끼고 도망치려 하는 열일곱의 학생입니다. 그토록 지겨워하던 그곳을 사실 무척 사랑하고 있음을 떠난 후 깨닫게 되죠. 새크라멘토에 대한 그녀의 정서엔 엄마에 대한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어요. 그녀에게 엄마는 함께 탄 차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한없이 불편하지만 사실 가장 인정받고 싶은 ‘세계’ 그 자체입니다. 크리스틴은 부유하지 않은 집을 부끄러이 여기고 숨기려 해요.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도 ‘레이디 버드’로 바꿔 부르죠. 그런 크리스틴에게 엄마는 이야기해요. 네가 우리를 창피해하는 걸 다 알고 있다고. 좋은 차가 아니라 학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려 달라고 할 때마다 네 아빠가 속으로 상처받고 있는 걸 알고나 있냐고. 부모도 나와 같이 상처받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게 언제였을까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제가 부모님에게 아로새긴 상처들을 떠올려요. 이제 와 착한 딸인 척 애써도 절대 없어지지 않을, 하지만 그들이 사랑으로 동여 맨 무수한 상흔들이요.
새크라멘토를 떠나기 위해 뉴욕의 대학에 지원하는 크리스틴에게 엄마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며 모진 말로 만류해요. 하지만 딸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서서히 보낼 채비를 합니다. 비록 떠나가는 순간까지도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해 쳐다보지도 않고 딸을 보내지만요. 뒤늦게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라며 다시 공항으로 달려가 눈물을 터뜨리는 크리스틴의 엄마를 보며 저도 함께 울고 말았어요. 두 딸이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해, 자신도 낯설기만 한 복잡하고 시끄러운 이곳에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주고 홀로 돌아가던 나의 그녀가 떠올랐거든요. 그날 엄마는 온종일 너무나 든든했는데, 마지막 기차 역에서 어린아이처럼 무너져 내리며 말했어요. 혼자 오지 말고 너희 아빠와 함께 올걸 그랬다고. 처음으로 엄마가 조그맣고 연약한 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죠. 그때부터 엄마를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크리스틴이 그토록 꿈꿔온 뉴욕에서 새크라멘토와 방해자로 여겼던 가족, 지우려 했던 옛 연인들을 떠올린 것처럼 저 또한 삶의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서서히 받아들이며 어른이 되었네요.
이 영화는 엄마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결코 찬란하지 않은 십대 시절의 방황과 성장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요. 현실적이지만 따뜻한 공감이 느껴져 완성도 높은 성장 영화로 꼽히죠. 그레타 거윅은 배우로서도 사랑스럽지만 감독으로서 정말 빛나요. 평범한 스토리로 마음 깊숙이 저장된 기억을 꺼내는 그녀의 뭉근한 영화들과 매번 사랑에 빠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의 영화들엔 제가 지구 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끔은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쓰고 싶은 대상이 있어요) 배우 시얼샤 로넌과 티모시 샬라메가 나와 더욱 보석 같이 느껴지네요. 엄마에 대한 세레나데로 글을 마치기엔 겸연쩍어, 그레타 거윅과 두 배우의 다음 만남을 고대하며 오늘의 일기- 아니 사사로운 영화 감상을 마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