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이었다. 작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입사 동기는 제사를 지내러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도 안 계신데 네가 잘해야지"
아무개 상사가 동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툭 하고 내뱉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부모님이 죽음에 이른 것에 동기는 어떠한 책임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부모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모든 것에 책임을 쥐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 무책임한 말을 문단의 앞머리에 붙여 언제고 나를 공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생사를 묻지 않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으며 생략과 사실을 섞어가며 대답을 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신다면)"올해로 74세이십니다." 간혹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 네, 아버지 그냥 회사에서 일하십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5년이 지났다. 아빠는 아프셨다. 위암이었다. 양약(洋藥)과 동양의학(東洋醫學, 韓醫學)을 전공하신 아빠는 수술을 거부하셨다. 항생제가 사람을 죽인다는 동양의학 의사의 고집 있는 철학이었다. 유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암이 유전인자에 있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점을 아빠는 빼닮았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당시 교제를 하던 남자 친구를 제외한 그 어떤 누구에게도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부기(父忌)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장례식을 찾는 사람들조차 싫었다. 조문객들의 슬픔과 위로는 내게 마지막을 인정하게 하는 작별 인사 같은 거였다. 눈물 한 방울, 슬픔 하나조차 내어주지 않으려고 철없이 싱글벙글 장난만 쳤다.
우리 가족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한 가족이었으나 서로를 끌어안지 못하는 이산가족이었고 실제로도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된 후로 내 형제는 타지에 있는 학교로 아빠는 한의학 협회의 제안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집에는 엄마와 나뿐이었는데 평생을 가정주부로 지내던 엄마가 일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네 식구가 각자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엉켜버린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빠는 엄마를 미워하게 되었고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중간의 자식이었다.
아빠는 고통이 심했는지 한동안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날은 운 좋게 통화를 할 수 있어서 좋은 이야기를 꺼내어볼까 했더니 엄마에 대한 원망만 잔뜩 늘어놓았다. 나는 화가 나서 마지막 순간까지 원망만 하고 살고 싶냐고 이런 식이라면 연락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정말로 고집을 피웠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장례식 이후로 단 한 번도 아빠를 찾지 않았다. 무서웠다.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아빠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화가 나있는 것 같다. 언젠가 용서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용서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아빠를 오랫동안 미워했지만 그 누구보다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길 바랄뿐이다.
PS.
아빠는 엉뚱하고 재밌는 사람이라는 것, 슬픈 영화를 볼 때 콧물 범벅이 될 만큼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 폴 포츠 성악가의 감동적인 이야기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친구를 따라갔던 콘서트에서 늦게 돌아온 겨울날 나를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아빠라는 것, 호기심이 왕성한 어린 내가 옛날이야기를 조를 때마다 긴 얘기와 짧은 얘기로 오래도록 황당함과 웃음을 주었던 것, 산짐승이 비둘기를 다 잡아먹어버리는 바람에 비둘기 새장과 관리인만 남겨진 비둘기 사업이 두고두고 웃음을 짓게 하는 것, 우리 가족이 한 집에서 살았을 때에 아빠의 출근길에는 온 가족들에게 수염 뽀뽀를 잊지 않았던 것,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나를 목마 태우고 등산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자주 다리를 절었다는 것, 아홉 달과 황달로 산부인과 의사조차 포기했던 나를 살린 사람이 아빠라는 것,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것.
기억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