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도망치기로 했다
우리는 늘 도망치지 말라는 말라는 말을 배운다
끝까지 버티라고, 그래야 성공한 삶이라고
사랑도, 일도, 관계도 어느 정도의 버팀이
어느 정도의 고난과 역경이 필요하니깐
틀리지는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런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게 있다
미련을 버티는 척하고 들어온다는 것을
아직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 같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달라질 것 같고
내가 한 번만 더 이해하면 괜찮아질 것 같은 얼굴로
그래서 사람이 아닌 가능성에 매달리기도 한다
나는 한 동안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기를 바랐다
기다리는 나 자신이 싫지 않았고
상처를 견디는 나를 대단하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알았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이었음을
끝내는 것이 무서워서
정답을 확인하는 것이 무서워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놓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기로 했다. 나의 미련에게서
확실하지 않은 기대에서
나를 붙잡아두는 상상에
이미 끝났을지도 모르는 장면을
계속 재생하는 습관에
이상하게도 도망치기로 결심한 날
나는 처음으로 가벼워졌다
사랑을 놓은 게 아니라
나를 붙잡고 있던 미련을 놓은 거였으니까
어떤 관계는 잡는 용기보다 놓는 용기가 더 크다.
나는 이제 끝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
다음 사랑이 오더라도
그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