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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마음 Aug 03. 2021

인간 히어로가 마음 상함에 대처하는 자세

(feat. 영화 '블랙위도우'와 책 '따귀 맞은 영혼')


나는 히어로물 찐 팬이 아니다. 다만 친오빠를 비롯해 히어로물을 사랑하는 찐 팬들이 주변에 많다. 그들의 영향으로 개봉하는 히어로물을 자연스럽게 감상하곤 하는데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개봉한 <블랙위도우> 역시 영화를 좋아하는 지인 덕분에 감상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블랙 위도우' 역할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의 솔로 무비라 많은 사람들이 기대가 컸나 보다. 시원한 액션물을 기대한 히어로물 찐 팬들은 아쉬운 소리를 남기는 모습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재미와 의미를 다 잡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기존 마블 시리즈 작품들에서 블랙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는 늘 알쏭달쏭한 표정연기로 속내를 알기 어려웠던 캐릭터였다. 단순히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컨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을 보고 나니 그녀의 세심한 캐릭터 연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쨌거나 영화를 보는 내내 히어로물이라기보다 한 편의 '가족 치유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간 히어로를 다룬 영화 <블랙위도우>. 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꼭 보면 좋을 것 같아 영화 속 장면을 키워드로 요약해본다.



상처 받은 어린 두 영혼

영화의 인트로는 블랙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한다.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녀의 모습과 동생 옐레나와 함께 노는 장면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행복했던 어린 두 소녀의 평화는 길지 않다.



러시아 스파이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위장 가족 멜리나(가짜 엄마)와 알렉세이(가짜 아빠) 아래에서 자란 두 자매는 3년간의 오하이오 생활을 끝으로 쿠바에서 '레드룸'에 입소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라고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단절된 채 살인 병기를 만드는 '레드룸'에서의 성장은 평화롭게 지내던 영화 첫 장면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나타샤와 옐레나가 상처 받지 않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해 강해진 두 영혼

쿠바에서 헤어짐의 순간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는 옐레나와 나타샤에게 총상 입은 멜리나가 말한다. "고통은 널 더 강하게 만들어줄 거야" , "그들에게 네 마음까지 빼앗기면 안 돼" 스파이 조직원으로 지낸 멜리나 역시 그런 믿음으로 평생 살아왔을 테다. 그 믿음에 의심 없이 딸들에게 남겼을 그 말은 두 어린 소녀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레드룸'은 어린 여자아이들을 킬러로 양성시킨다. 그곳에서 다양한 훈련을 통해 최정예 위도우가 되는 길은 험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 소녀는 같은 환경이지만 서로에게서 분리된 채 상처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각자 강한 위도우로 성장한다. 아니 성장보다 '생존한다'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난소와 자궁을 제거당하고 화학물질을 통해 자유의지 조차 잃은 채 조종당하며 임무를 수행했던 옐레나. 다행히 동료의 해독제 덕분에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게 되면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나타샤는 레드룸에서 탈출한 채 영웅의 모습으로 살아가다 과거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피하기 위해 또다시 은둔의 삶을 선택한다. 그 역시 생존을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법이지 않았을까?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스스로를 껍질 안으로 숨겨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따귀 맞은 영혼'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더없이 강해지기도 어떤 환경을 탈출하기도 안전한 곳을 향해 숨기도 한다. 나는 대체로 생존을 위해 강해지는 편인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편인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숨어버리는 편인가?



서열싸움에서 존중으로의 성장


배다른 자매의 재회는 격정적인 몸싸움으로 이루어지는데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자 경계하는 태세에서 현실판 형제 자매의 흔한 서열싸움을 연상시킨다. 첫째가 둘째에게 "내가 너보다 어른이야" "언니(오빠)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 우리 오빠만 그랬나? 영화 속 장면은 어릴 적 오빠와의 난투극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옐레나는 예전의 여섯 살 아이가 아니다. 성인이고 레드룸 내에서도 최고의 암살자였다. 그대로 있으란다고 있겠는가. 언니를 죽일 듯 칼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내 입에서는 헉소리와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나타샤는 동생의 성장을 인정한다. 어릴 적 넘어져 울던 여섯 살 옐레나가 아님을 받아들이고 성장한 동생을 한 개인으로 존중하는 모습에서 나타샤 역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실망이 낳는 두 번째 상처


나타샤는 옐레나와의 만남을 통해 레드룸에 '자유의지'를 잃은 채 조종당하는 요원들을 구하고자 마음먹는다. 그 과정 속에 드레이코프에 헌신했다가 조직에 배신당한 채 감옥에 갇힌 아버지 '엘렉세이'를 구하고 어머니 '멜리나'를 찾아간다.


그런데 속 없는 아빠 '알렉세이'는 상처 받은 두 딸들의 마음에 일절 관심이 없다. 심지어 자신의 지난 행동에 대한 변명은 영화 밖 현실 속 '부모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비평준화 시절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내가 희망하는 곳이 아닌 인문계 1위 고등학교 진학을 강요하셨던 나의 엄마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다 너 잘되라고, 성공하라고 그랬다." 상처 받았던 두 딸은 비록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반성의 기미 없는 그의 모습에 실망한다. 나타냐의 표정 속에 내가 보이는 것은 왜일까.




상처 받은 마음의 고백



위장 가족으로 살았던 3년의 시간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던 동생 옐레나는 다시 모인 가족과의 식사자리에서 용기 내 자신이 상처 받았음을 고백한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행복했던 부분이 가짜였다는 사실에 느꼈던 배신감뿐만 아니라 레드룸에서 자기를 두고 혼자 탈출한 언니 나타샤에게도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의 서러움을 말하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옐레나처럼 용기 있지 못했던 내 모습과 많이 차이가 있다. 옐레나는 영웅으로 활동하는 언니를 보며 존경심과 동시에 부러움 뿐만 아니라 레드룸 내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 무력감과 열등감을 가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자신이 받은 상처(느꼈던 생각, 감정)를 표현함으로써 상대에게 접촉하던 옐레나의 용기로 인해 재회한 '가짜' 가족이 '진짜' 가족처럼 힘을 합하는 계기가 된 것 아닐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드레이코프에 맞서는 나타샤에게 멜리나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바퀴를 굴리는 쥐에 스스로를 비교하며 '내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자신도 레드룸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네 번의 도전 끝에 그녀는 탈출을 포기하고 순응한 채 레드룸 조직원으로 살아왔다.



나타샤는 멜리나에게 말한다. 우리는 쥐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그렇기에 다시 도전을 선택할 수 있다. 계속되는 시도와 실패 속에 스스로에게 마음을 걸어 잠근 멜리나. 나타샤는 그런 그녀에게 다시 한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손을 내민다.



'그들에게 네 마음까지 뺏기면 안 돼'라고 말했던 멜리나 덕분에 인간으로서 '선택'하는 삶을 살았던 나타샤. 그녀는 '자유의지'를 잃은 채 조종당하다가 해독제를 통해 '자유의지'를 되찾은 다른 위도우들에게도 띵언을 남긴다.



이제 너희들 스스로 선택해야 해



과거의 내사에 따라 행동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넘어서느냐 하는 선택권은
항상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중략)
바로 여기에, 내사를 변화시키고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자리합니다.

따귀 맞은 영혼 / p.244



상처 받은 마음도 인생도 모두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아마 이 영화가 주고 싶은 메시지이지 않았을까?

 <따귀 맞은 영혼>에서도 많은 심리학 책에서도 항상 이야기한다. 과거와 달리 변화를 원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사과와 용서가 낳는 치유와 신뢰



사과와 용서는 상처 받은 마음을 더욱 적극적으로 회복시킨다.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은 가족은 단단한 신뢰를 쌓는다. 당초에 신뢰가 전제되었기에 사과와 용서도 이루어졌으리라. 레드룸을 무찌르고 다시 마주한 '가짜'가족은 어느새 솔직한 '진짜'가족이 되었다.



옐레나에게 혼자 버려둔 채 탈출했던 과거를 사과하는 나타샤.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사과하고 있음이 보인다. 가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했던 나타샤는 내면 깊숙이 3년간 추억 속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이 성전 안에 복수라는 건 없네

넘어진 사람을 다정하게 안내할 의무뿐

그러면 친구 손에 이끌려 그는

기쁘고 흐뭇하게 더 좋은 나라로 떠나네

이 신성한 성벽 안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곳에선

적이란 적은 모두 용서해버리니

배신자가 숨어들 틈 없네

이런 가르침에 기뻐하지 않는 자

사람이라 할 수 없으리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중에서



신뢰는 서로에게 더욱 솔직하게 만든다. "할 말 없어요?"라고 묻는 나타샤에게 "확실히 상처 입은 것 같다", "엉망이 됐다" 고 말하는 멜리나와 알렉세이의 모습은 확실히 새로운 반응이다. 허세가 사라졌다.




<따귀맞은 영혼>을 읽던 중이라 영화 속 인물들의 '마음 상함'과 '회복'에 포커스를 두었지만 영화 <블랙위도우>는 가족 내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처와 치유, 회복의 과정 외에도 생각해볼거리가 많다. 가부장 제도에 맞서는 여성의 연대,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 등 우리 삶 속에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영화 속에 담았다.


인간 히어로의 솔로 무비인만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좋았던 영화 <블랙위도우>. 혹시 당신이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지해야 할 선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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