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은 환상일 뿐 1

미리 알았더라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by 채리

주방에서 접시를 닦으며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허드렛일이 전부였지만, 일하는 중간중간 셰프들과 장난도 치고 음식도 나누어 먹으면서 재미있게 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다 보면 영어도 자연스레 늘지 않겠는가.


상상

꿈에서 깨 정신을 차려보니 내 옆에는 뜨거운 김을 내뿜는 식기세척기 한 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내 역할은 말 못 하는 식기세척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명도 넘는 셰프들이 무자비하게 쏟아내는 조리기구와 식기구를 기계같이 닦아야만 했다. 고무장갑도 끼지 않고 미끄러운 바닥을 뛰어다니며 낑낑거려봤자 셰프들은 성에 차지 않아 했다.


“빨리! 빨리!”


어디서 배웠는지 셰프들은 내게 이 한 마디는 꼭 한국어로 외쳐댔다. 대뜸 나를 뒤로 밀쳐내며 필요한 접시를 직접 닦는 셰프들도 있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한마디와 함께.


“이건 네일인데, 보고 있기 답답해서 내가 직접 한다.”


능력 부족이겠지만 나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주방에는 늘 출근 전부터 더러운 식기들이 쌓여 있었다. 셰프들은 닦는 사람(나)이 따로 있다고, 내 눈에는 하염없이 깨끗하기만 한 식기 마저 일단 던져주고 봤다. 적당히 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일 못하는 내가 참아야지 별수 있겠는가.


현실


구직자 시절 하루빨리 일을 구해야 한다는 간절함에 눈이 멀어 이 식당에 대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게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식당이 아닌, 호텔에 연결된 2층짜리 레스토랑이었다. 빈 그릇을 운반하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을 정도로 큰!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되던 일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드디어 알게 됐다. 난 일 층과 이 층에서 쏟아내는 식기를 모두 닦고 있었다. 식당일을 처음 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하나만 제외하면 일에 대한 내 환상은 완벽히 들어맞았다. 동료들끼리 장난도 치고, 음식도 나누어 먹으며 일을 했다. 물론 나만 빼고. 난 일을 하는 기간을 통틀어 파인애플맛 탄산음료를 한 잔 얻어마신 게 전부였다.

치사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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