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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Feb 04. 2021

지나친 육류 소비에 대한 단상

에세이

 

 소위 ‘먹자골목’이라고 불리는 식당가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쉽사리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대개 ‘육류’를 판매한다는 점이다. 그렇다. 오늘날 한국에서 ‘육류 섭취’에 대한 접근성은 과거에 비해 훨씬 용이해졌다. 2016년 8월 15일 농협 축산경제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15년 기준 연간 육류 소비량은 평균 47.6kg이다. 1970년 5.2kg에 비해 9배나 증가했다. 불과 50년도 안되어서 우리의 식탁에 ‘육류’는 빠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소, 돼지, 닭 등의 가금 및 가축의 ‘고기’는 이미 우리의 식단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만큼 우리는 가금 및 가축의 ‘육류’를 자주 많이 소비하고 있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자주’ ‘많이’ 고기를 섭취하고 있는가?

 인간에게 육류를 통한 단백질 및 영양요소 섭취는 필수적이다. 초기 원시 인류는 ‘육류’를 섭취했기에 뇌의 성장과 발달이 이루어졌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육류 섭취’란 필수적인 일이다. ‘임금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에게 먹는 것은 하늘만큼 중요한 일이고 그중 ‘육류 섭취’란 그 하늘 위 하늘만큼 중요한 일이자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육류를 이용한 국물 요리와 육류 외의 부속재료(내장, 뼈)까지 요리에 이용된 것은 그만큼 ‘육류 섭취’가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한국은 경제 성장에 따라 물질적 풍요가 이루어졌고 ‘육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그에 걸맞게 축산업도 발전하였다.

 문제는 그 이면에 있다. 한국의 축산 방식은 가금 및 가축을 협소한 장소에 밀집하여 공장 식으로 사육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병해에 취약하여 항생제를 투여한다.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호르몬제를 투여하기도 한다. 또한 영양제, 항생제, 성장촉진제가 배합된 유전자 조작 농산물 사료를 먹인다. 대개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인한다. 소비자는 육류 섭취에 대한 욕망으로, 생산자는 이익 창출에 대한 욕망으로 악수(惡手)를 두고 악수(握手)를 나눈 것이다.

 일련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사육된 가금 및 가축이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 전 겪어야 할 수난이 하나 더 남았다. 한해 걸러 한해 꼴로 또는 매해 발병되는 조류독감과 구제역이다. 이번 조류독감으로 인해 도살 처분된 가금 수만 3000만에 이른다. 또한 올해 2월부터 충북·전북·경기 지역에서 구제역이 창궐하고 있다. 가금 및 가축 전염병의 확산은 ‘인수 공통 감염’이라는 위험 가능성을 갖는다. 인수 감염으로 인해 전염병이 확산될 경우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다름 아닌 인간에 의해서 말이다. 이는 인재(人災)이다. 누구나 이를 주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낙관하고 안일해한다.

 ‘육류 섭취’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렇게까지 해서 ‘자주’ ‘많이’ 먹어야 할까? 생각해보자. 소, 돼지, 닭 등의 가금 및 가축들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영양제, 성장촉진제, 항생제가 잔뜩 들어간 사료를 먹인다. 이렇게 급하게 살을 불리고 찌운 가금 및 가축이 어이없게도 전염병에 픽픽 쓰러져나간다. 이때에는 아직 살아있는 것마저도 도살하여 땅에 묻는다. 그러다 힘이 빠지면 그냥 산 채로 땅에 묻는다. 장마로 인해 비가 억수로 내리는 어느 날 토사가 무너지고 비닐이 찢기며 부패한 것들이 땅에 드러난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다. ‘위험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는가? 우리는 갖은 위험성을 내포한 상태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맥을 즐기고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는다.

 ‘육류 섭취’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욕망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했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도 우리의 ‘욕망’에 달려 있다. 조금 더 분별 있고 의식적인 육류 소비에 대한 욕망이 필요하다. 혹자는 소, 돼지, 닭 등의 가금 및 가축이 현재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인류의 ‘먹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우리가 가금 및 가축을 학대한 끝에 포식할 권리가 있는가? 우리가 포식자로서 가금 및 가축을 먹을 권리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피식자 나름의 권리가 있다. 수천 년을 인간과 함께 하며 인간의 양식이 되었기에, 적어도 정상적인 과정과 방식을 거쳐 먹혀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해볼 것이 있다. 우리는 경제 성장에 따른 물질적 풍요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 한 사례가 앞서 말한 육류 섭취에 대한 접근성 향상이다. 조금의 금전적 여건만 충족한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육류를 소비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 어딘가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이 즐비하다. 제3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최소 생존을 위한 영양 섭취를 하고자 노동을 한다. 땅에 떨어진 낟알을 주워 흙을 털어 내곤 먹는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운이 좋다면 원조기구의 도움을 받아 삶을 연명한다. 반면에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초국적 농식품 복합체가 이해에 따라 국제 곡물 가격을 조정하기 위해 수많은 양곡을 폐기 처분한다. 또한 이들 업체가 생산한 많은 양의 곡물이 거대 축산 업체들의 사료로 이용된다. 축산업체들은 밀집 방식의 사육을 거쳐, 저가에 육류를 조달한다. 농식품 복합체의 곡물 사료화와 축산업체의 초과 육류 공급. ‘육류 섭취’의 불평등을 넘어 ‘식(食)’의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이다. 누군가는 최소 생존을 위해 ‘식’의 투쟁을 치른다면, 누군가는 초과 육류 공급을 통해 이익을 도모하고, 누군가는 과잉 육류 섭취라는 여흥을 즐긴다.

 오늘도 아마 고기반찬을 먹을 것이다. 특 A+++급 한우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어느 TV광고의 문구에서처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것이다. 때로는 소, 돼지, 닭을 하루 만에 다 먹기도 할 것이다. 어제도 그랬듯 오늘도 내일도 고기를 먹을 것이다. 그때 한 번쯤은 의식해보자. 우리는 이렇게 자주 많이 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비정상적 사육 방식으로 인한 많은 위험성을 묵인한 채. 동물의 권리를 무시한 채. 지구촌 어딘가 굶어 죽은 누군가에게 침묵하고, 거대 농식품 복합체와 축산 업체의 횡포와 만행에 묵과한 채.

(2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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